거일2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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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2리의 행정구역은 평해읍으로 되어 있지만 후포항이 인접해 있어 생활권역은 후포와 가깝다. 그래서 예전부터 거일2리의 사람들은 생필품 구입 등은 모두 후포에서 구입해왔다. 2008년 현재 해안도로가 건설이 되어 후포로 가는 길이 쉽지만, 1964년 해안도로가 건설이 되기 전에는 거일2리 마을 뒤의 산을 넘어가야 했는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원들은 후포로 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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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2리에서 미역짬을 분배하는 것을 ‘짬구지’라고 한다. 짬구지는 정확한 날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삼복 무렵에 짬구지를 실시한다. 예전에는 삼복이 되기 전에 짬구지를 시행하여 삼복에는 짬을 정비하였다. 여기서 짬의 정비는 짬 주변에 청소를 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것을 지칭한다. 그러나 짬의 정비를 하지 않으면서 짬구지 날짜도 뒤로 미루어지기 때문에 이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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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거일2리에서 대게는 지금과 비슷하게 그물을 던져서 잡았다. 그러나 현재 나일론실로 만들어진 그물이 없던 시절 거일2리 사람들은 대게를 잡기 위한 그물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였다. 당시 사용하던 그물은 한 폭이 약 50m 정도로 그물은 크게 부자, 망목, 벼리 세 부분으로 나뉜다. 부자는 그물 윗부분에 위치하며 그물이 물 위에 뜨게 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의 부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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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에 속하는 법정리. 지형이 기[게]알과 같이 생겼다 하여 기알·거일 또는 게알이라 하였다가 거일리라 불렸다. 본래 평해군 하리면(下里面) 지역으로서, 1916년 3월 1일 저장동(猪場洞)·직고동(直古洞)·상남산동(上南山洞)·하남산동(下南山洞)이 통합되어 거일리로 개편되었다. 1980년 12월 1일 평해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평해읍 거일리가 되었다.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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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11일에 방영된 인기드라마 대장금에서 울진대게에 관한 부분이 나와 화제가 되었다. 최상궁: 송이와 검은 해삼, 전복은 어찌 됐느냐? 금영: 이미 손질을 다 해둔 상태입니다. 헌데 상어지느러미가 없습니다. 최상군: 괜찮다. 대신에 울진에서 올라온 대게를 찢어 상어지느러미탕처럼 만들 것이다. 금영: 대게로요? 최상궁: 그래! 울진대게의 맛은 임금님도 경탄해 마지않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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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2리 서쪽은 봉화대(烽火臺)에서 내려온 산이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남쪽은 후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은 거일1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은 후포로 넘어가는 산등성이로 막혀 있으며, 동쪽은 동해 바다를 바라보고 자리 잡은 작은 어촌마을이다. 마을에서 동해 바다로 23㎞ 떨어진 곳에는 동해 어족자원의 보고로 알려져 있는 왕돌초에 다다를 수 있다. 거일2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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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어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날씨였다. 특히 지금처럼 동력선이 없던 시절에는 바람의 영향이 매우 컸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은 동해에서는 해류의 영향보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파도도 함께 치기 때문에 항상 바람의 방향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거일2리 주민들은 바람에 따라 각각 이름을 붙였는데 동풍은 들바람, 서풍은 하늘바람, 남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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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거일1리에 있는 개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2001년 울진군지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울진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1350년 고려시대 충정왕 때 안성이씨가 이 마을에 와서 터전을 잡고, 박씨가 개척을 할 당시에 마을의 동쪽에 ‘개’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마을 사람들이 ‘개바위’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구암(狗岩)’이라고 부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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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2리의 남자들은 바다에서 보낸 시간이 많기 때문에 마을 또는 가정일을 돌볼 시간이 없다. 마을에서 중요한 일들은 노반에서 결정하지만, 궂은일은 모두 마을의 부녀자들이 도맡아 하였다. 특히 65세 이상의 부녀자들은 노인회에 가입이 되기 때문에 65세 이전의 부녀자들은 모두 부녀회원이 되어 마을일을 하고 있다. 현재 부녀회원은 45명 정도이다. 부녀회비는 따로 내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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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다른 마을에서는 거일리를 말할 때 “거일 개는 입에 지전(돈)을 물고 다닌다.”라고 한다. 대게로 인해 많은 부를 쌓은 거일리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당시에 후포항에는 활어수출과 대게로 통조림을 만들던 동림수산이 있어 거일2리에서 잡은 대게는 큰 것은 전량 동림수산에 위판되었고 크기가 작은 대게는 등짐장수들에게 팔았다. 그러나 보통 이러한 호황에 현재와 같이 선원에게 월급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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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한 후 거일2리로 들어온 남편 김억수는 돈을 벌기 위해 원양어선을 탔다. 보통 원양어선을 타게 되면 3년에 한 번씩 돌아오기 때문에 집안일은 모두 그녀의 담당이었다. 그러나 원양어선의 벌이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원양어선을 탈 때 송출(잡은 고기에 상관없이 월급을 받는 것)로 배를 타지 않고 작업선(잡은 고기의 양에 따라 돈을 받는 것)을 탔기 때문인데, 간혹 고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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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2리의 노반은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과거에 비해 그 영향력이 많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노반의 역할 비중이 컸을 때 마을의 대소사는 모두 노반을 거쳐서 결정되었다. 노반의 주요 역할에는 동중 대행사 운영의 심의 결정, 동임 선발, 동중 제반재산의 관리감독, 동제·별신제의 제관 선정 및 제의 주관 등 대부분의 마을 일을 모두 노반을 거쳐서 결정되었다.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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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2리에는 대게잡이 이외의 가장 큰 소득은 미역이다. 특히 대게잡이는 개인의 그물을 직접 들고 나가 개인이 잡은 만큼 소득을 올리기 때문에 여러 명이 함께 배를 타고 나가더라도 개인적 성격이 강하다. 10여 년 전까지 미역은 마을의 주요 생산물로써 짬을 통해서 채취된 미역을 널 자리가 없어서 이웃끼리 싸웠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는 당시 이곳에서 미역이 대거 생산되었음을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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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추석을 전후로 한 가을이 되면 쿠릴해류와 쿠로시오해류가 동해상에 만나 동해는 풍부한 먹이와 급격한 수온변화 때문에 어군이 모여들어 좋은 어장을 이룬다. 특히 이때 찬 쿠릴해류를 따라 남하하는 어종으로 오징어가 있다. 베링해협 인근에서부터 남하를 시작하는 오징어는 우리나라 제주도 앞까지 남하한다. 남하를 하면서 점점 살을 찌우는 오징어는 동해상에서 가장 통통하게 살이 찌고 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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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거일2리의 앞바다는 대게잡이 배들이 가득한 중요한 어항이었다. 대게를 실은 배가 해변으로 들어오는 날이면, 대게와 화목(땔감) 등을 바꾸기 위해 마을을 찾아왔던 등짐장수와 봇짐장수들이 몰려들었고, 만선의 배를 타고 올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들로 해변은 사람들로 붐볐다. 후포항이 축조된 후 더 이상 항구로서 기능을 하지 못하였지만, 변변한 정박시설이 없어도 배들이 정박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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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2리 사람들의 생활에서 대게가 비교적 긴밀한 관계였음을 대변해 주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의 생활에서 오랫동안 전해지고 있다는 ‘기줄당기기’이다. 기줄당기기는 거일리 부녀자들의 음력 정월 보름 또는 정초에 거일 앞바다 모래사장에서 행했다고 전해지는 놀이이다. 기줄당기기는 게줄당기기라고도 하는데, 그 모양이 일반적 줄당기기와는 다르며 그 모양새가 게와 비슷하다고 하여 기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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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2리에 도착하게 되면 서쪽으로 울창한 숲과 동쪽으로 푸른 바다 그리고 사이에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 꽤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거일2리를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수림은 왠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는 섬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거일2리를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수림을 비교적 최근에서야 조성하였다고 하면 어떻게 된 것일까. 오늘날 석유, 연탄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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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은 우리나라 바다 전역에서 생산이 되는데 북부 쪽은 얕은 곳에서 남부 쪽에는 깊은 곳에 미역이 서식하여 미역의 생육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은 수온인 것을 알 수 있다. 미역이 생육하는 데 적정 수온은 5~19℃이다. 거일2리에서 미역은 정월대보름이 지나면 채취를 시작하는데 미역이 성장 상태에 따라 채취시기의 변화가 있다. 2008년에는 미역의 성장이 느려 3월 중순이 되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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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2리와 후포는 해안도로로 연결되어 비교적 편리하게 두 지역을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해안도로가 건설되기 전에는 거일리에서 후포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마을 뒤의 산을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그 불편함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이후 동력선이 생기면서 더 이상 거일 앞바다에 배를 정박할 수 없게 되자, 대부분의 배를 후포항에 정박해 두었다. 하루의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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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거일2리에서 대게잡이가 활발한 시절에는 40자가 넘는 큰 배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큰 배라도 배 위에서 숙식부터 시작해 모든 일을 배 위에서 해결하는 선원들에게는 좁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 안에서 일정하게 공간을 분류하여 공간 활용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또한 공간의 활용적인 부분과 함께 선원의 지위에 따라 공간의 이용이 달라진다. 선원들이 배를 타고 나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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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거일2리에 노반이 구성되어 있으며 마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나 옛날 만큼의 큰 영향력은 끼치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는 노반에서 정한 자치규약이 국법보다 더욱 철저하게 지켜졌다. 마을의 자치규약은 구성원들이 지켜야 하면서도 구성원이 모두 감시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법보다 더욱 무섭게 느껴졌던 것이다. 만약 노반에서 정한 규약을 어겼을 경우에는 역시 마을의 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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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배들은 GPS, 음향탐지기 등 여러 기구가 있어 고기가 어디에 사는지, 먼 바다에 나가서도 항구로 돌아오는 길이 어딘지 알 수 있지만 과거에는 이러한 기구는 전혀 없을뿐더러 나침반도 없었다. 그래서 바다에 그물을 던져 놓고 그 그물을 거둬들이기 위해서는 그 위치를 파악해 두어야 했다. 이렇게 위치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거일리 사람들은 산 가늠법을 사용하였다. 산 가늠법은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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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에서는 어민들의 어업경영상의 공동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공동어장을 제1종, 제2종, 제3종으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제1종 공동어장은 최간조시 평균수심 100m 범위로 맨손, 나잠, 간단한 채취도구로 작업을 실시할 수 있는 곳이다. 제2종 공동어장은 최고조시 해안선에서 500m범위이며 지인망, 지조망, 선인망, 예인망, 휘리망, 분기초망, 등망 등을 사용할 수 있다. 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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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2리에서는 이전부터 이월 초하루면 이월 영등할머니 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 영등할머니를 바람의 신이라고 하여 영등을 잘 모셔야 바다에 나가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고, 영등을 잘못 모시면 큰 해를 입는다고 하여 영등을 매우 무서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거일리에서는 영등할머니제사를 ‘영두한다’라고 하며 영등제사를 지낼 때 쓰는 영등까꾸리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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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결혼한 후 거일2리로 들어온 손춘권은 처음에는 시집에 들어가 살았지만 곧 분가를 하게 되었다. 미역짬을 분배할 때 집이 없으면 미역짬을 분배받지 못하는데 시집에 계속 살게 되면 시부모님 몫의 미역짬만을 분배받기 때문이다. 분가한 이후 손춘권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남편 김억수는 원양어선을 탔기 때문에 한번 뱃일을 나가면 몇 개월씩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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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계절이 오면 거일2리 앞 백사장은 오징어를 말리기 위한 건조대로 가득 찼다. 백사장 가득히 건조대에 오징어가 걸려 있는 모습은 큰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것도 하나의 문제였는데 바로 백사장이 좁아 오징어를 널 자리가 부족한 것이다. 오징어가 많이 잡힐 때는 백사장뿐만 아니라 동네 전체에 오징어가 걸려 있었는데 이웃끼리 오징어를 널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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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리의 부녀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손춘권은 남제주군 성산포 시흥리에서 태어났다. 11남매의 9째로 태어나 제주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13세의 나이에 부모님이 모두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부산의 지장 대변에서 물질을 하고 있던 맏언니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언니의 따뜻한 보살핌과 처제들을 자식같이 대해준 형부의 덕분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특히 형부는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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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이 지나고 대게를 잡는 계절이 오면 대게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손길은 매우 바빠진다. 대게를 잡기 위해 어구를 준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그물이다. 현재 사용하는 그물은 나일론실로 만든 그물로 그물이 찢어지거나 손상되면 수선이 힘들어 버리고 새로운 그물을 사지만 과거에는 개인의 그물을 개인이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기 때문에 직접 보수를 해야만 했다. 우선 중요한 것은 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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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과 밭이 부족한 거일리에서 쌀밥은 자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사와 같은 매우 특별한 날 또는 부잣집이 아닌 경우에는 쉽게 먹을 수 없었다. 특히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가 적었기 때문에 쌀밥을 먹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쌀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으며 햅쌀이 나면 햅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미고사’를 지냈다. 신미고사는 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