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2131 |
---|---|
한자 | 李廷賓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Stone for Lee Jeongbin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9-4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명희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이정빈의 신도비.
[개설]
이정빈(李廷賓)[1539~1592]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관(景觀)이다.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손자로 명종 때의 권신 이량(李樑)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함안 윤씨로 첨정 윤지청(尹之淸)의 딸이다. 부인은 증 정경부인 청주 한씨로 사헌부 감찰 한수(韓洙)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평에서 왜군에게 피살되었다.
[건립 연혁]
이정빈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평에서 왜군에게 화를 입고 피살되었다. 후일 아들 이명과 이충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으므로 증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후손이 1984년 10월에 이정빈 신도비를 세웠다.
[형태·구성]
이정빈 신도비의 비신은 오석으로 되어 있고 이수(螭首)[건축물이나 공예품 따위에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로 가첨석(加檐石)[지붕돌]을 올린 형태이다.
[관련 사건·일화]
이정빈은 1563년(명종 18) 유학(儒學)으로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갑과로 장원 급제하였으나 이는 아버지 이량이 시제(試題)를 미리 알고서 답을 대신 작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을 거쳐 과거 급제 4개월 만에 이조 좌랑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량이 이조 판서가 되자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사간원 정언으로 전직되었다. 이때 이정빈은 자신의 후임으로 친구인 류영길(柳永吉)을 추천하여 대간의 심한 반발을 받았으나 오히려 대간이 삭직 및 외직으로 전출되었다. 그 뒤 아버지가 삭직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가치 및 의미]
이정빈은 임진왜란 때 가평에서 왜군에게 피살되었고, 그 후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 곤좌에 안장되었다고 쓰인 묘갈(墓碣)[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이 있다. 사실 신도비는 1984년 후손이 세운 것으로 사료적인 가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