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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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宣祖 |
영어공식명칭 | Seonjo |
이칭/별칭 | 하성군,목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 목릉에 안장된 조선 후기의 왕.
[개설]
선조(宣祖)[1552~1608]는 조선의 제14대 왕으로, 초명은 균(鈞)이며, 뒤에 연(昖)으로 개명하였다.
[가계]
본관은 전주, 중종(中宗)의 손자로서,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岧)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세호(鄭世虎)의 딸 하동 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이다.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 왕후(懿仁王后)와 가례를 올렸고, 의인 왕후가 일찍 승하하자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 왕후(仁穆王后)와 다시 가례를 올렸다. 의인 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하였으며,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임해군과 광해군을 두었다. 이후 인목 왕후로부터 영창 대군과 정명 공주를 얻었다. 그 외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까지 포함하면, 총 14명의 아들과 11명의 딸을 두었다.
[활동 사항]
선조는 1567년 명종(明宗)이 후사 없이 죽자 즉위하여, 1608년 사망할 때까지 재위에 있었다. 선조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청수하고 아름다운 자질이 있어, 후사가 없었던 명종이 선조를 마음에 두었다고 한다. 하루는 명종이 여러 왕손들에게 왕이 쓰는 익선관(翼善冠)을 써보라고 하였는데, 선조는 그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지만 두 손으로 익선관을 받든 후 아무나 쓸 수 없는 것이라며 사양하였다. 이에 명종이 기특하게 여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선조가 즉위한 후 명종의 비 인순 왕후(仁順王后)가 수렴청정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선조가 직접 정사를 돌보게 되었다. 선조는 재위 초부터 사림(士林)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당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를 증직(贈職)시키고, 기묘사화를 주도한 남곤(南袞)에게 내려졌던 관작을 다시 빼앗았다. 이러한 조치와 함께 과거에만 의존하지 않고 학문과 덕이 뛰어난 이들을 널리 등용하여, 사림들이 대거 조정에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을 닦았다고 평가된다.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와 같은 대학자들도 극진한 예우로 대하였다. 선조의 이러한 정책은 많은 인재들이 조정에서 활동하도록 하였고, 후대 사람들은 선조의 치세를 목릉 성세(穆陵盛世)라고 찬양하기도 하였다. 많은 인재들이 활동하였던 만큼, 신념이나 학연 등에 따라 붕당이 이루어져,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이때 만들어졌다. 두 붕당은 이후 여러 계기를 통해 분화하면서 조선 후기 특유의 정치 형태인 붕당 정치를 이루게 된다.
붕당 정치는 기본적으로는 정치 현안이나 성리학 해석에 대한 다양한 의견 개진을 가능하게 하여 긍정적인 기능을 하였으나, 붕당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정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선조 대에도 이미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등으로 인해 붕당 간의 대립이 유혈 충돌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선조는 문치에 힘을 썼으나, 무비(武備)에 소홀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북방 야인들이 변경을 어지럽히자 신립(申砬)을 중심으로 야인들을 소탕하여 국방을 안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전쟁 위협을 오판하여 임진왜란을 겪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일본 전국 통일 후인 1590년 통신사로 다녀 온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의 상반된 보고 가운데,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김성일의 보고를 따르기로 하였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선조가 비록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보고를 따르기로 하였지만, 나름대로 전쟁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일본이 침입하자, 북방 야인들을 주로 상대하였던 조선의 정규군은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의 전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의 모든 국토가 황폐화되는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순신을 필두로 한 수군의 활약과 각지에서 이어진 의병의 참전, 명군의 도움 등으로 결국 왜란은 진정되었고, 이후 복구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연이은 흉년과 붕당 간의 대립이 이어졌다.
선조는 임진왜란 중 유사시를 대비하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인목 왕후와의 사이에서 뒤늦게 적자 영창 대군이 태어나면서, 광해군의 입지가 흔들리게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임종하면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영창 대군의 존재는 이후에 이어질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묘소]
선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목릉이다. 선조의 비 의인 왕후와 계비 인목 왕후도 함께 묻혀 있다. 목릉은 같은 능역 내의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 이강릉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부터 차례대로 선조, 의인 왕후, 인목 왕후의 능이다. 1600년(선조 33)에 먼저 세상을 떠난 의인 왕후가 현재 목릉의 자리에 묻혔으며, 당시에는 유릉(裕陵)이라는 능호를 썼다. 1608년 선조가 사망하자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목릉이라는 능호로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터가 좋지 않다는 의견으로 인해 목릉을 현 위치로 옮기면서 유릉이라는 능호는 쓰지 않고 목릉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1632년(인조 10) 인목 왕후가 사망한 후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1970년에 동구릉 전체가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선조의 신위는 조선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 봉안되어 있다.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대제를 봉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