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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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明聖王后 |
영어공식명칭 | Myeonseong Wangh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1-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숭릉에 묻힌 조선 후기의 왕비.
[개설]
명성왕후(明聖王后)[1642~1684]는 조선의 제18대 왕 현종(顯宗)의 비(妃)로, 1642년(인조 20) 서울 중부 장통방(長通坊)[현재 종로1가 부근]에서 태어났다.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으로, 아버지는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며, 어머니는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 송씨(宋氏)이다. 현종과의 사이에서 제19대 왕 숙종(肅宗)과 세 명의 공주를 낳았다.
[활동 사항]
명성왕후는 1651년(효종 2) 세자빈에 책봉되어 현종과 혼인하였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명성왕후는 매우 명석하였으나, 때로는 정사에 깊이 관여할 정도로 과격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1675년(숙종 1)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복선군(福善君)과 복창군(福昌君), 복평군(福平君)을 궁인과 간통하였다는 이유로 고발하였는데, 간통 사실에 대한 증거가 없는 무고에 불과했으므로 무죄로 판결하였다. 도리어 여러 대신들은 김우명을 무고죄로 고발하여, 김우명이 죄를 입을 처지에 놓였다. 그러자 당시 왕대비였던 명성왕후는 대신들 앞에서 곡을 하면서 김우명을 변호하려 하였다. 결국 이는 명성왕후와 김우명의 처신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명성왕후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명성왕후는 1683년(숙종 9) 창경궁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명성왕후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의 숭릉에 묻혀 있다. 숭릉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으로,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1674년(현조 15) 현종이 사망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는데, 산릉을 조성하던 중에 승려의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드러나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깊이가 그리 깊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고 광중(壙中)[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의 밖이라는 이유로 능을 조성하였다. 숭릉의 석물은 효종의 구 영릉(寧陵)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영릉을 여주로 옮길 때에 본래 영릉 자리의 석물을 그대로 땅에 묻었다가 다시 파내어 숭릉에 이용한 것이다. 1683년(숙종 9) 명성왕후가 사망하자, 쌍릉 방식으로 능을 조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1970년 동구릉 전체가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명성왕후의 신위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은 종묘에 봉안되어 있다.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