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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332
한자 蔚珍浦
영어의미역 Uljinpo Por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212-2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심현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지명|포구
관련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여도비지』|『대동지지』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왕피천 하구에 있던 조선시대 포구.

[개설]

조선 초기에는 각 도별로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에 의해 기선군(騎船軍)[수군]을 통할하였다. 영진체제(營鎭體制)가 갖춰지면서 각 도의 요새수어처(要塞守禦處)별로 군사 조직이 편성됨에 따라 고려 이래로 두어온 만호(萬戶)에게 외침 방어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458년(세조 4)에 영진체제가 진관체제(鎭管體制)로 바뀌면서 각 도 연해안의 요해처나 북방 내륙의 여러 진에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만호·절제도위(節制都尉) 등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동첨절제사와 절제도위 등은 대개 독진(獨鎭)이 아닌 경우에는 지방 수령이 겸했으나, 만호만은 무장(武將)이 별도로 파견되어 이들이 사실상 일선 요해처의 전담 무장이 되었다.

[형성 및 변천]

1413년(태종 13) 지방제가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울진은 강원도 삼척도호부의 관할이 되었다. 세종대[1418~1450]에는 양계와 각 도 연변의 군사적 요지를 상긴(上緊)·중긴(中緊)·하긴(下緊)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때 울진은 하긴이 되었다.

1466년(세조 12) 진관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삼척도호부에 소속되어 있던 울진은 강릉부 진관으로 이관되었으며, 왕피천 하구에 있는 포구인 울진포에는 포진(浦鎭)이 설치되고 수군만호가 배치되었다. 이후 울릉도를 수토(搜討)할 때 수토군이 평해군의 월송포에서 출발하기도 했으나, 이곳 울진포에서도 출발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여도비지(輿圖備志)』·『대동지지(大東地志)』 등의 문헌에 울진포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울진포진은 본래 울진읍 현내동 고현포에 토성을 쌓아 설치되었다. 1512년(중종 7)에는 울진현에서 남쪽으로 11리 떨어진 근남면 수산리 수산역 동쪽 비래봉에 석축을 쌓아 이축하였다. 포진성의 규모는 둘레 750척, 높이 11척 정도였다.

이 성에는 수군만호 1명과 수군 400명을 주둔시켰고, 수군만호는 종4품을 배치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에 정3품의 첨절사를 두었다. 그러나 1512년(중종 7)과 1627년(인조 5) 사이에 갑술년은 1514년(중종 9)과 1574년(선조 7)이 나오기 때문에 숙종 갑술년은 중종 갑술년이나 선조 갑술년의 오기(誤記)로 판단된다. 수군만호는 1627년에 폐지되었다.

[위치비정/행정구역상의 구분]

울진포진울진읍 내에서 남쪽으로 약 2㎞ 떨어져 있으며, 울진읍근남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212-2번지 일대로 왕피천 하구 북쪽에 해당된다. 당시 수군 부대의 성 터였던 포진성이 비래봉에 아직까지 남아 있으며, 주변으로는 논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왕피천 하구에 울진포로 기재되어 있다.

[관련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진현 관방 울진포영조에는 “수군만호일인(신증)정덕임신석축주칠백오십척고십일척(水軍萬戶一人(新增)正德壬申石築周七百五十尺高十一尺)”이라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지』 울진현 고적 울진포폐현조에는 “재현남십일리본조초치수군만호시성파금유석성주칠백오십척중종칠년소축(在縣南十一里本朝初置水軍萬戶時省罷今有石城周七百五十尺 中宗七年所築)”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도비지』 울진현 폐진 울진포진조에는 “일운고현포치남십일리중종임신축석성주칠백오십척치수군만호즉수산역지동(一云古縣浦治南十一里中宗壬申築石城周七百五十尺置水軍萬戶卽守山驛之東)”이라는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 울진현 진보 울진포진조에는 “일운고현포동남십리중종칠년축성주칠백오십척구유수군만호(一云古縣浦東南十里中宗七年築城周七百五十尺舊有水軍萬戶)”라는 기록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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