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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익·이화익 형제 기념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394
한자 李穆翊-李和翊兄弟紀念碑
영어의미역 Monument for Yi Mokik·Yi Hwaik Brother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희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건립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관련인물 이목익|이화익
재질 화강암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
소유자 경주이씨 울진종친회

[정의]

1977년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에 건립된 독립운동가 이목익·이화익 형제를 기리는 비.

[개설]

온정면 소태리 하암동(河岩洞) 태생인 이목익(李穆翊)은 품성이 강직하여 비리에 굴하지 않으며 편안하고 검소한 성품을 가졌다. 특히 외래품을 적극 배제하였으며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통탄하여 음식을 전폐하고 충(忠)으로 죽기를 작정하였으나, 아들과 조카들이 음식을 권하기가 난감하며 죽는 것은 무익함에 후일에 의거(義擧)를 생각하고 3일 만에 다시 밥상을 대하게 되었다.

그 후 정의심에 불타 한탄하며 울분으로 지내다가 1920년에 일본 물품의 배척포고문을 온정리(溫井里)에 게시한 사건으로 온정주재소(溫井駐在所)에 구금되어 울진본서(蔚珍本暑)로 압송되었고, 압송 도중에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본서에 도착하자 원등서장(遠藤暑長)에게 욕설로 물러가라 하였다. 감금(監禁) 14일 후 부산형무소(釜山刑務所)에서 금고 6개월의 형을 받아 복역하였다. 고종(高宗)이 서거한 후에는 백립(白笠)을 쓰기 시작하여 1945년 8월 15일 광복 전까지 계속하여 오다가 광복(光復)과 동시 백립을 벗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목익백립옹(白笠翁)이라 불렀다.

또한, 그의 동생 이화익(李和翊)은 1919년 4월 4일 울진군수 강성희(姜星熙)가 지방민의 소요(騷擾)를 미리 방지하고자 온정면 소태리에서 면내 유력자를 집합시켜 훈화하고,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았다. 그 다음 날인 4월 5일 아침 9시 반경에 자전거를 타고 평해면으로 가던 도중 헌병주재소에서 가까운 곳에서 군수의 통행을 막고 서약서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협박하고 폭언하다가 헌병대에 연행되었는데, 연행 도중에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 구금되어 부산형무소에서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건립경위]

1977년 2월에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에 일제강점기 국산품 애용운동과 고종황제 서거 후 백립을 착용한 이목익과,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일본의 서명 운동을 거절하고 독립만세 운동을 벌인 동생 이화익을 기리고자 울진 지역의 애국지사 전영경과 삼율의 김병두가 나서 성금을 모아 비각을 세웠다.

[위치]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 온정초등학교 아래에 있으며, 평해읍에서 국도 88호선을 타고 서쪽으로 약 8㎞를 가면 온정면 소태리에 도착한다. 온정종합터미널 맞은편의 길로 300m를 올라가면, 좌측에 온정면사무소 위로 이목익·이화익 형제 기념비가 있다.

[형태]

장방형의 제단에 이중의 장방형 받침돌, 화강암으로 만든 비신, 용을 조각한 이수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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