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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731
한자 張良守神道碑
영어의미역 Spirit-path of Jang Yangsu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708[고성3길 31-68]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인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건립시기/일시 1984년 3월연표보기
관련인물 장양수
재질 화강암
높이 257㎝
너비 68㎝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708[고성3길 31-68] 월계서원지도보기
소유자 울진장씨 문중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월계서원에 있는 장양수의 신도비.

[건립경위]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장양수의 묘소를 전쟁 가운데 잃어버리자 후손들이 울진군 북쪽 매정동(梅亭洞)에 단(壇)을 모아 제사를 지내오다, 장양수의 행적을 보존하고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84년 3월 월계서원 내에 신도비를 세웠다.

[형태]

화강암으로 제작하였으며 귀부와 이수, 비신을 갖추고 있다. 둘레에는 철제 난간을 둘렀다. 비석의 높이는 257㎝, 너비는 68㎝이다.

[금석문]

비석의 앞면에 세로 2줄로 ‘고려봉익대부추밀원부사전리판서상호군울진장선생신도비(高麗奉翊大夫樞密院副使典理判書上護軍蔚珍張先生神道碑)’라고 새겼고, 뒷면에 비문과 명(銘)을 새겨넣었다. 비문은 외후손인 영양(永陽) 이용구(李龍九)가 짓고, 인주(仁州) 장병훈(張炳壎)이 썼다.

“고려시대에 전리판서를 지낸 장공(張公)의 묘소가 전쟁 가운데 잃어버린 지가 오래되었다. 여러 후손들이 일찍이 울진군 북쪽 매정동 양지 바른 언덕에 단을 모아 제사를 모시고, 또 이제 신도비를 월계서원(月溪書院) 남쪽 언덕에 세우기를 여러 사람들이 의논한 뒤 후손인 진(震), 철수(轍洙), 보균(甫均), 영소(永韶) 등을 시켜 나에게 그 내력을 말하고는 신도비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나 내 본시 보잘것없는 하찮은 사람이라 백세(百世) 뒤에 태어나서 백세 옛날 어른의 사적을 밝힌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요, 더군다나 이런 거룩한 일을 담당하기에는 부적당한 사람이며 동시에 글도 대수롭지 못한 처지라 극구 사양했으나 부득이하여 원본을 참고하여 적는다.

공의 휘는 양수(良守)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태사(太師) 휘(諱) 정필(貞弼)의 후손이다. 4대를 거쳐 말익(末翼)이란 분이 평장사상주국(平章事上柱國)이란 벼슬에 오르고 울진군(蔚珍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인데 후손들이 이래서 울진을 관향으로 삼았다. 고조부(高祖父)의 휘는 취정(就正)인데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으며 증조부는 영의(令宜)인데 영동정판문하성사(令同正判門下省事)를 지냈고 조부는 세상 사람들이 직장공(直長公)이라 불렀고 부친은 한연(漢連)이라고 하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동정(同正) 벼슬을 지냈다.

모친은 울진임씨(蔚珍林氏) 유무(惟茂)의 따님으로 삼남 이녀를 두었다. 맏은 진(瑨)인데 원외랑(員外郞)이요 다음은 신(信)으로 검교호군(檢校護軍)이요 막내는 서(瑞)이다. 딸은 임준(林俊) 방광(房光)에게 출가했다. 진(瑨)의 아들은 원석(元碩)으로 상서(尙書)를 지냈고 신(信)의 아들 거석(擧碩)은 예빈승동정(禮賓丞同正)을 지냈고 흥석(興碩)은 문과에 급제했다.

지면 관계로 증손 현손 이하는 다 적지 못한다. 공은 고려 희종(熙宗)조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추밀원부사 전리판서 상호군(上護軍)으로 치사했다.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었으나 세월이 너무나 오래 흘렀고 상황이 여러 번 변하여 남긴 글도 자취도 모두 없어져서 만에 한 가지라도 얻어볼 수 없게 되었고 심지어는 생졸 연대와 배위(配位)의 성씨마저도 전하지 않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오로지 공의 관함(官銜)인 홍패(紅牌)와 교지를 지금도 후손들이 간직하고 있는데 왼쪽에 적힌 직명과 성명을 보면 왕규(王珪), 임유(任濡), 최충헌, 기홍수(奇洪壽), 최선(崔詵) 등이 지공거(知貢擧)로 되어 있고 연호는 태화(泰和) 을 축년으로 표시했다.

중간에 후손 태항(泰恒)의 꿈으로 여러 번 겹치는 재앙을 면하고 현재 국보 제181호로 지정되어 문광부에 등록되어 있고 사림(士林)의 여론으로 월계서원에 배향까지 했으니 옛 어른을 모시는 도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 드디어 명(銘)을 짓는다.

선정(先正) 양수(良守) 선생은 산천의 정기를 타고났네/ 구름이 피어나니 비 내리듯 문명사회 만나서/ 높을시고 벼슬이여 태평성대 명신이다/ 세월이 변천하여 재난을 만났구나/ 높은 덕망 위대한 사업 운수(雲水)처럼 흘러가/ 문헌(文獻)도 남지 않고 유택마저 잃어버렸네/ 귀중한 자취는 오래도록 전해오고/ 번성하는 자손들은 그 수가 천만이네/ 조상의 사적은 알고서 전해주니 그 정성 오롯하다/ 빛나는 신도비로 경건하게 모셔오니/ 거북머리 빛을 내어 천지가 다시 밝아/ 내 말하나 보탬 없이 무궁토록 전해가리.

1983년 계해(癸亥) 모춘(暮春), 외예영양후인(外裔永陽後人) 이용구(李龍九) 근찬(謹撰), 인주(仁州) 장병훈(張炳壎) 근서(謹書).”

[현황]

울진장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비교적 최근에 건립되어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의의와 평가]

울진장씨 울진 입향조로서의 지위와 함께 고려시대 인물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서 인물 자료의 정리와 함께 보존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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