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1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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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瑞神道碑 |
영어의미역 | Spirit-path of Hwang Seo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인표 |
성격 |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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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80년 |
관련인물 | 황서(黃瑞) |
재질 | 화강암 |
높이 | 257㎝ |
너비 | 68㎝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 |
소유자 | 평해황씨 종중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 황서의 신도비.
[개설]
황서 신도비는 동일한 규모와 양식의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의 신도비와 함께 있다. 평해황씨인 황서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세자를 위하여 세 번이나 원나라에 갔다 와서 익대공훈(翼戴功勳)으로 벼슬이 금자광록대부금어대첨의평리문하시중(金紫光祿大夫金魚袋僉議評理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건립경위]
황서의 후손들이 공의 관작과 시호 등이 족보와 고려사에 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선현들의 손에 의해 기록된 당시의 사행(事行)과 휘적(徽蹟) 등을 한 조각도 고증할 자료가 없어 애석히 여겨 왔다. 이에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고, 증거로 보완, 정리하여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1980년 8월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에 신도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형태]
황서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제작하였으며, 사각형의 비좌와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양을 부조한 지붕[가첨], 비신을 갖추고 있다. 둘레는 철제 난간을 둘렀다. 비석의 높이는 257㎝, 너비는 68㎝이다.
[금석문]
비석의 전면에 세로 2줄로 ‘고려 금자광록대부 평리문하시중 시문절공 평해 황선생 신도비(高麗 金紫光祿大夫 評理門下侍中 諡文節公 平海 黃先生 神道碑)’를 새겼고, 뒷면에 진성(眞城) 이종호(李從鎬)가 지은 비문과 명(銘)을 새겨 넣었다.
“공의 성은 황씨요 휘(諱)는 서(瑞)니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세자를 위하여 세 번이나 원나라에 갔다 와서 익대공훈(翼戴功勳)으로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금어대(金魚袋) 첨의평리(僉議評理)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하였으니 족보에 기록되어 있고 또 고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찾아보면 첨의(僉議) 주열(朱悅)과 좌정승(左政承) 한종유(韓宗愈)와 지첨의(知僉議) 황서(黃瑞)와 전서(典書) 양사도(梁思道)와 시중 차원부 등 5인이 동시에 문절(文節)로 시호를 받았다 하니 충분한 증거이고 충(忠)자가 문(文)자로 바뀌었다 하나 위선(衛先)의 도(道)에 무방하다 하겠다.
시조의 휘는 낙(洛)이니 한(漢)나라 성제(成帝) 건시(建始) 3년 신묘에 출생하여 수화(綏和) 계축에 대장군 강하후(江夏侯)로 봉함을 받았는데 광무(光武) 4년 무자에 갑고의 아들 휘 온인(溫仁)은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를 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평해의 선조시고 1세를 지나 휘 유중(裕中)은 문하시중으로 삼남을 두셨으니 백씨의 휘는 진(璡)이니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요 계씨의 휘는 용(庸)이니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으로 시호는 충경(忠敬)이요 중씨(仲氏)는 곧 공이시다.
공의 일가에 이와 같이 벼슬이 혁혁한데도 세상에 많이 나타나지 못한 것은 자손된 자의 한이 아닐 수 없다. 자고로 국가의 성쇠도 무상하고 사람의 흥찬(興贊) 또한 때가 있는 법. 세월이 오래되고 증거도 인멸되어 있는데 자손들이 사적(史蹟)을 고증하여 밝혀서 후손에게 전하여 알게 한다는 것은 간단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보본(報本)하고자 하는 정(情)과 우모(寓慕)하고 싶은 성(誠)이 없을 수 없기에 원근의 자손들이 뜻을 모아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우기로 논의를 정하고 세명(世明)과 보(甫)가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비명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관작(官爵)과 시호(諡號) 등이 족보와 고려사(高麗史)에 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선현들의 손에 의해 기록된 당시의 사행(事行)과 휘적(徽蹟) 등을 한 조각도 고증할 자료가 없으니 전하는 말만 가지고 만족할 수 없는 형편이고 보면 선생의 고명하신 붓으로 상(上)과 하(下)를 참고하고 여러 기록들을 증거로 보완하여 후세 자손에게 전할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라 내가 정신도 희미하고 병든 몸으로 감히 부탁을 받을 수 없어 재삼 사양하였으나 마지못하여 가지고 온 행장을 살펴보니 공이 충렬(忠烈), 충혜(忠惠), 충숙(忠肅), 충목(忠穆) 4조(朝)에 벼슬하면서 왕명으로 원(元)나라에 서른한 번이나 다녀왔기에 그 공으로 익대(翼戴)의 공훈(功勳)을 받았으니 그 충군의 성덕(盛德)과 가언선행(嘉言善行) 등이 만분의 일이라도 얻어질 것 같고 또 정려나 신도비를 세울 수 있는 광영이 될 것이다.
조의 휘는 우정(佑精)이니 군기소윤(軍器少尹)이요, 고의 휘는 유중(裕中)이니 문하시중(門下侍中)이요, 자는 종량(宗亮)이니 호부전서(戶部典書)요, 손은 세영(世英)이니 진사로 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이요, 증손은 둘이니 용기(龍起)는 예빈장(禮賓將)이요, 운기(雲起)는 내자소윤(內資少尹)이요, 용기에게 세 아들이 있으니 길보(吉甫)는 병사(兵使)요, 계보(季甫)는 보승낭장(保勝郎將)이요, 유보(有甫)는 중랑장(中郞將)이요, 길보의 자는 득재(得載)니 함풍(咸豊)현감이요, 득중(得重)이니 호조좌랑(戶曹佐郞)이요, 유보의 자는 후(厚)니 예빈판관(禮賓判官)이요, 득재의 자는 옥숭(玉崇)이니 한성판윤(漢城判尹)이요, 후의 자는 옥산(玉山)이니 예빈참봉(禮賓參奉)이요, 옥강(玉崗)이니 삼우당습독(三友堂習讀)이요, 옥숭의 자는 보곤(輔坤)이니 생원이요, 보곤의 자는 우(瑀)니 성주(星州)목사요, 찬(瓚)이니 안릉참봉(安陵參奉)이요, 연(璉)이니 훈도요, 우의 자는 응하(應河)요, 응청(應淸)이니 진사로 진보(眞寶)현감이니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봉향하고 응징(應澄)이니 증통훈대부장예원판결사(贈通訓大夫掌隸院判決事)요, 응청의 자는 거일(居一)이니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요, 유일(有一)이니 성균관정자(成均館正子)요, 경일(慶一)이요, 천일(千一)이요, 억일(億一)이요, 응징의 자는 여일(汝一)이니 문과로 승지(承旨) 공조참의(工曹參議)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요, 찬의 자는 득시(得時)요, 득룡(得龍)이요 득원(得元)이요, 연의 자는 응쇄(應碎)요, 응정(應挺)이요, 응탁(應擢)이요, 득시의 자는 영복(榮福)이요, 희복(希福)이요, 득룡의 자는 춘우(春雨)요, 득원의 자는 복수요, 응쇄의 자는 춘일(春一)이요, 응탁의 자는 도일(道一)이요, 승일(承一)이요, 득중의 자는 옥견(玉堅)이요, 옥견의 자는 세복(世福)이요 세복의 자는 영(瑛)이요, 영의 자는 맹춘(孟春)이요, 중춘(仲春)이요, 계춘(季春)이니 원주(原州)판관이요, 자는 하수(河壽)니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이요, 옥산의 자는 인석(麟碩)이요, 구석(龜碩)이요, 계석(季碩)이요, 인석의 자는 한좌(漢佐)니 진사요, 한필(漢弼)이요, 한우(漢佑)요, 한창(漢昌)이요, 구석의 자는 한보(漢輔)요, 계석의 자는 한침이요, 한좌(漢佐)의 자는 세원(世元)이니 문과진사(文科進士)요, 준(浚)이니 자헌대부(資憲大夫) 의금부사(義禁府事)요, 한필의 자는 세환(世還)이요, 한우의 자는 응종(應悰)이요 한창의 자는 응만(應萬)이니 비안(比安)현감이요, 한보의 자는 응경(應敬)이요, 한침의 자는 준(俊)이요, 옥강의 자는 영(英)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예천군수(行醴泉郡守)요, 자는 혁(革)이니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행홍천현령(行洪川縣令)이요, 자는 중추(仲秋)요, 계추(季秋)요, 세원의 자는 민전(敏全)이니 선무랑(宣務郞)이요, 준의 자는 삼계(三繼)니 통정대부(通政大夫) 원주목사(原州牧使)요, 중숙(重淑)이니 통덕랑(通德郞)이요, 세환의 자는 승성(承成)이니 예빈(禮賓)이요, 응종의 자는 모일(模一)이요, 응만의 자는 순일(順一)이요, 응경(應儆)의 자는 정일(廷一)이요, 중추의 자는 오견(五堅)이요, 계추의 자는 천석(天錫)이다.
아! 한 집안에 이렇게 많은 벼슬이 있었으니 전광찬후(前光贊後)하는 것은 이치가 그렇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자손이 더욱 번성한데 우모(寓慕)할 곳이 없다는 것은 공을 위하여 미안하고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23세 사손(嗣孫)인 재우(載宇)가 나를 찾아 와 명(銘)을 청하니 후생된 자 어찌 감히 사양만 하리요. 가지고 온 행장을 살펴서 위와 같이 기술하고 이어서 명을 하니 명왈(銘曰)
공이 고려에 태어나서 높은 벼슬이 우뚝 솟았네/ 덕망과 신임이 높고 두터웠으며 기품과 정신이 정숙(精淑)하였네/ 4대를 내리 섬기셨으니 그 충의를 누가 앞서리요/
원나라가 통제권을 가지고 힘으로 좌지우지하였지/ 힘이 약한 우리로서는 하는 수 없이 복종했네/ 왕을 모시고 세 번씩이나 갔지만 우리 주군에게 욕됨이 없었다네/ 나랏님이 공훈을 하사하여 문호(門戶)에 큰 빛이 되었네/ 자손들 백세천세 되도록 아름다움을 전하며 산다네/ 나라가 이름이 바뀌면서 사람의 사정도 달라졌다네/ 큰 업적이 자취가 없는 것은 세월이 오래되어 증거가 없기 때문/ 조상의 아름다움을 밝히지 못하니 후손된 자 허물이 아니겠나/ 신도비 세워 공을 새기니 정에도 합당하고 사리도 원만하네/ 이 돌에 기록함이여 사적을 고증하여 새겼다네/ 용두에 거북 대좌여 천년만년 보전하리로다.
백원(白猿) 중추(仲秋) 진성(眞城) 이종호(李從鎬) 삼가 찬함."
[현황]
평해황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비석을 건립한 지 오래되지 않아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의의와 평가]
고려시대 인물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여러 가지 자료를 정리하여 자료의 가치를 높이고, 보존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