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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리 창유계 사건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B020104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매화2리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매화2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여수경

1919년 매화장터 만세사건 이후 일본인의 감시는 더욱 심해지고, 1943년 3월 조선독립공작당과 농민조합사건 이후에 독립운동은 침체기를 겪게 된다. 항일운동을 재기하기 위해 울진군에서는 다양한 활동들이 재개되는데 그 과정에서 매화리에서 창유계 사건이 발발하였다. 창유계는 당시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학도병과 지원병, 보국대, 징용을 강요하고 물적으로는 식량을 위시하여 조선의 목재, 생산물, 철기, 공유 등 관련 생활용품들을 모두 강제수거해 가고 조선어를 폐지하는 등 그 횡폐가 날로 더해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일본의 만행에 항거하기 위해 창유계를 비밀리에 조직하였다. 그러나 계원 중 한명이었던 매화리에 거주하는 최황순(崔晃淳)의 집에서 당시 계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말미에 ‘우리도 꽃이 필 때가 있다’라는 구절을 트집으로 최황순을 체포하고 다른 면에 있던 나머지 5명을 함께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최황순 외 연행된 5명의 체포에 대한 사실을 드러내기도 전에 수산천 도서장에서 통행하는 청년의 몸에서 창유계 회의일자가 적힌 통지서가 발각되고, 일본은 비밀스럽게 조직된 무허가 조직임을 추궁하며 관련된 102명을 모두 체포하기에 이른다. 당시 그들의 체포 이유는 일본에 대한 항일 및 공산사회주의비밀결사라는 죄목이었으며, 이 중 60여명은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나머지 60여명은 흑두건으로 복면을 시켜 끌고 다녔는데 이를 두고 흑두건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창유계 사건으로 매화마을과 관련된 사람은 최황순을 비롯한 윤대규(尹大奎), 이두연(李斗淵) 등 세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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