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D02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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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죽변4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명동 |
1951년 함경남도 호원군 삼호면 사람들은 한 배에 동네사람 82명이 타고 피난을 떠났다. 죽변을 떠나서 포항에 도착하지만 해병들의 저지로 정착하지 못하고 구룡포에서 한 달여를 보내고 다시 죽변으로 옮겼다. 당시 70여명의 함경도 사람들은 죽변4리 등대 아래에 정착하였고, 이곳에 하꼬방이라 하는 쪽방을 짓고 처음 그들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제주도 잠녀들의 판자촌이 늘어선 집들 옆으로 판자집으로 지은 쪽방 일명 하꼬방들을 짓고 그들은 피난생활은 시작된다. 당시에만 하여도 이곳에 정착해서 거주할 것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전쟁만 끝나고 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며, 그 기간은 7~8년으로 생각하였다. 늘 고향에 돌아갈 것을 감안해 나무판자로 대충 지은 집이었기 때문에 세간도 올바른 것이 없었다. 늘 한쪽에는 떠날 준비가 된 보따리들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농지도 어떤 새로운 것은 구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돌아갈 때 이것이 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여기 올 때처럼 아무것도 놔두고 가는 것 없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 기간이 점점 길어졌다. 전쟁인 종전되었지만 분단되어 더 이상 고향으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개를 두 번 넘어 20년이 흘러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졌다. 그렇게 북쪽만을 바라보다가 돌아가신 아바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고향을 그리워 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갑작스런 피난으로 가족들을 함께 데리고 나오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당시 군대에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피난을 선택하였는데, 잠시 몸만 피하고 돌아올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자신들의 가족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또 여름이 아닌 겨울에 나선 피난에 가족들이 행여나 동사할 위험이 있어 잠시 아버지만 몸을 피하고 좀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그렇게 북에 어린 자식들과 처를 두고 남한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어느 듯 흘러 북한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듯 그들에게 부여된 ‘아바이’라는 명칭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사는 곳도 아바이촌으로 불린다. 한때 ‘38따라지’들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돌아갈 생각에 그 또한 대수롭지 않게 지날 수 있었다. ‘아바이’는 함경도에서 자신보다 연령이 높은 사람을 지칭하여 부르는 호칭에서 비롯되었다. 죽변에 온 70여명의 함경도 사람들은 상호를 ‘아바이’라 불렀으며, 이제 낯설지 않게 되었다. 70여명의 함경도 사람들은 홍원, 북청, 신창, 어대진 사람들이다. 이후 다른 피난민들이 오기도 하였지만 극소수이며 현재의 ‘아바이촌’이라 불리는 지역은 당시 함경남도에서 이주한 이들을 지칭한다.
죽변4리가 가장 번성한 때는 총 가구수가 500가구가 넘었으며, 월남한 이주민들은 80여호였다. 현재는 360여 호에 함경도 출신 주민이 약 50여호이다. 1980년대 아바이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돌아가자 그의 자식들은 죽변을 떠난 경우가 많아 그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