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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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乭石 |
영어음역 | Sin Dolseok |
이칭/별칭 | 순경,신태홍,신태을,신대호,태백산호랑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심현용 |
[정의]
조선 말기 경상북도 울진에서 활동했던 평민 의병장.
[가계]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순경(舜卿). 신석주(申錫柱)의 아들이다. 신돌석(申乭石)의 본명은 신태호(申泰浩)이고, 신태홍(申泰洪)·신태을(申泰乙)·신대호(申大浩) 등으로도 불렸다. 경상도 영해(寧海)[현 경상북도 영덕군] 출신이다.
[활동사항]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신돌석은 19세의 젊은 나이로 1896년 3월 13일 영해에서 100여 명의 의병으로 기병하였다. 신돌석 부대는 경상도 동해안 지방을 차례로 점령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경상도 출신으로 경기도에서 활동하던 김하락(金河洛) 부대, 안동의 유시연(柳時淵) 부대와 합세하였으나 영덕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의병 부대는 해산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재개되자 1906년 3월 13일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라는 이름으로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4월에 울진 장흥관(長興館)의 일본군 함선 9척을 기습 파괴하고, 6월에는 원주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어 삼척·강릉·양양·간성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무찌르고 또 일본군의 전선 가설을 방해하였다.
1907년 울진에서 의병을 증강하여 영덕의 관공서를 습격하고 영양의 주곡(注谷), 진보(眞寶)[현 청송군과 영양군]의 삼위(三危), 경주의 대산성(垈山城), 영덕의 조현(鳥峴)에서 일본군을 연이어 격파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전국 13도의 의병이 연합하여 서울 공격을 목적으로 양주에 집결하였다. 신돌석도 경상도 의병을 대표하여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그러나 당시 의병장은 대부분이 양반 출신이었기 때문에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이 이끄는 부대는 13도 창의군의 편제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13도 창의군은 계획과 지도력의 미흡으로 인해 서울 공격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신돌석 부대는 영해로 되돌아와 1908년 1월에 평해의 독곡(獨谷)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안동·울진·삼척·강릉 등지의 의병과 연합해서 춘양(春陽)·황지(黃池)·소봉동(小鳳洞) 등의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1908년 4월에는 울진의 도곡(道谷), 7월에는 평해의 한곡(寒谷), 9월에는 희암(喜巖)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10월에 영양으로 돌아온 후 날씨가 추워져 이듬해 봄을 기약하고 의병은 해산되었다. 11월 18일 신돌석은 영덕 눌곡(訥谷)에서 김상렬(金相列) 형제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영덕군에는 1995년에 생가인 초가집이 복원되어 신돌석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