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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리와 이산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641
한자 黃堡里-李山海
영어의미역 Folk Tale of Hwangbo-ri and Yi Sanha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황보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조은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설화|태몽담
주요 등장인물 이산해|이지번과 부인
관련지명 황보리
모티프유형 부모가 똑같은 꿈을 꾸고 이산해를 잉태함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황보리로 귀양 온 이산해에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2001년 울진군지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울진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이산해(李山海)[1539~1609]는 조선시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평란공신으로 아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문충공의 시호를 하사받았다. 이산해는 토정비결을 지은 이지함의 조카이며 이지번의 아들이다. 이지번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산해관에서 잠을 자면서 부인과 정사를 나누는 꿈을 꾸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부인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더니 부인도 그날 밤에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그 후 부인은 태기가 있어 10개월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이산해였다. 산해관 몽교로 인하여 태어났다고 하여 아이의 이름을 산해라고 지었다고 하였다. 또 귀신의 아이라고 하여 백일하에 다녀도 그림자가 없었다고도 하였다.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하인이 쇠스랑을 메고 가는 것을 보고 ‘뫼산(山)’ 자라고 하였으니 재주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다섯 살 때는 숙부 이지함이 독서와 사색에 빠져 식사하는 것을 잊고 있자, 숙부를 보고 시를 지어 읊었다고 한다.

1556년(명종 13)에 진사 시험에 급제하고 선조 3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호당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하면서 이조판서·대제학·좌의정을 거쳐 율곡 선생의 예언대로 영의정까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산해의 주장으로 임금은 서북 변경으로 피난을 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은 이산해가 나라를 망쳤으니 벌을 주고 정철은 석방해야 한다고 하였다. 임금은 이산해의 무죄를 알면서도 정철을 석방하고 이산해를 평해 황보리로 귀양을 보냈다.

황보리로 귀양을 온 이산해는 평해 일대의 산천을 누비며 국정의 어지러움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연민하고, 처자식에 대한 그리움으로 괴로운 세월을 시로 달래었다. 이때 시집 2권이 문집으로 간행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기성면 사동 해월헌의 헌기와 월송정월송정기와 같이 양정에서 지은 시 등은 아직까지 전해져 『울진군지』에 기재되어 있다. 정탁의 청원으로 5년 뒤에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어 전란 수습의 공을 인정받아 아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

[모티프 분석]

「황보리와 이산해」 이야기의 모티프는 아이를 잉태하기 전에 부모의 꿈에 똑같이 나타나 선몽을 하였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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