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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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시집 올 당시 장평은 열다섯가구가 마을을 이루며 살던 곳이었다. 여옥란이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텃골에 세 집, 무조골에 한 집, 씨시골에 한 집, 창골에 한 집, 반지에 두 집 등 이웃이라고 해도 한참동안을 걸어서 가지만 그래도 이웃이 있던 시기였다. 1968년 울진·삼척무장공비사건으로 큰 동네인 두천리로 강제로 이주하게 되면서 장평에 사람들이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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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에 있는 무동력 소형 어선. 가이선 어로는 주로 혼자서 하는데, 한 손으로 작은 노를 저으며 수경을 통해 바다 속을 들여다보고 다른 한 손으로 문어·해삼·전복 등을 잡는다. 울진군 죽변면 죽변4리는 6·25전쟁 직후에 70여 명의 북한 출신 피난민들이 터를 잡아 일구었기에 이른바 ‘아바이마을’로 불린다. 아바이마을에 정착한 이들은 함경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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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장소에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제주도 잠녀와 함경도 아바이 모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속성들을 이주 지역에 연장시킬 수 있는 여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살아갈 터전을 마련하고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앞으로 먹고 살길이었다. 이 과정에서 사실 함경도와 제주도에서 지속한 민속학적 의례들을 챙길 정신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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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흥원군 삼호면 신성리에서 태어난 심정섭은 1950년 12월 22일날 북한에서 이곳으로 내려왔다. 그의 나이 30살이었다. 함경도의 마을은 어릴 때부터 거주했던 고향이었다. 마을에는 부모님과 형님, 사촌 등 형제들이 살았으며, 그의 어린 자식들과 처가 살고 있었다. ‘내려갔다가 금방 오꾸마’라는 말을 남기며 추운 겨울날 그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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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아바이들은 월우회를 조직하였다. 홍원군 16명, 북청군 8명 총 24명의 회원으로 출발하였다. 그들이 모임을 조직한 것은 죽변에서 자리 잡기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1951년 남으로 내려와 죽변에 터를 잡았을 당시에도 돌아갈 것을 기정사실로 했기 때문에 모임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돌아갈 사람들로 생각하여 어떤 새로운 것을 사지도 구입하지도 않은 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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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의 지역민들의 공동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분배·소비하는 활동 및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생산적 활동의 총체. 일반적으로 경제산업이란 인간의 공동 생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회 관계와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 전반을 가리킨다. 보통 농업·공업·수산업·임업·광업 등을 지칭하나, 넓게는 생산과 직접 관계되지 않는 상업·금융업·서비스업 등도 포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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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지역에 분포하는 산등성이와 봉우리 사이가 낮은 지형. 울진군의 지형은 태백산맥과 태백산맥 동록의 해안저지로 대별될 수 있다. 또한, 태백산맥은 지형적 특성에 의해 다시 중앙산맥과 해안산맥으로 구분된다. 이중 중앙산맥은 온정리-매화천-울진을 연결하는 구조선 서쪽에, 해안산맥은 그 동쪽의 산열을 의미한다. 한편, 해안저지는 태백산맥이 동편에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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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에서의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못했다. 설움도 많이 받았고, 먹을 것이 없어 고기를 담은 함티기를 지고 돈과 쌀로 바꾸기 위해서 저 멀리 울진군 근남면까지 걸어서 바꿨다. 늘 굶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고, 부녀자들은 고무 보따리를 이고 애를 업고 고기를 팔아서 쌀과 고구마, 감자를 바꿔서 생활했다. 하지만 이 고생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오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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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이후 민가가 형성되고 1900년대 죽변으로 이름을 대외적으로 보내기 시작하면 이곳은 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군사적으로 중요성을 인지하여 성을 축조한 것에서 일본인들은 지리적으로 생태적으로 유리한 이곳에 이주지를 만들었고, 이후 동해안의 어류에 따라 사람들은 웃고 울기를 여러 번 그리고 마지막 원자력발전소의 건립에 따른 여러 영향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경상북도 최북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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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과 수단. 1. 조선시대의 교육 조선시대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는 관학 교육과 사학 교육이 시행되었다. 관학 교육기관으로는 울진향교와 평해향교가 있었는데, 울진향교는 1484년(성종 15)에 울진읍 읍내리에 건립되었고, 평해향교는 1357년(공민왕 6)에 명수학교라는 이름으로 반월산에 창건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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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후포면에서 북면까지 동해안을 따라 연결되는 국도. 국도 7호선은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개설된 도로로 본래 부산~원산선이라 하였다. 1963년부터 부산~온성 간 도로라 하여 부온선(釜穩線)이라 하였고, 근년에 와서는 동해간선도로(東海幹線道路), 또는 동해선이라고도 한다. 울진군을 통과하는 중심 교통로로서 울진군 구간의 기점은 후포면 금음리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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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에서 개항기 이후 이루어진 건축물. 근대건축은 일본에 의한 강압적인 개항과 서구 열강과의 통상조약 이후 서구 문물이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개항은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던 만큼, 최초의 근대건축물은 일본의 외교 공관이었다. 울진 지역의 근대건축은 대부분 일제에 의해 이루어져 일본식 목조건물과 서양식 건조물이 많지만 여전히 한옥 양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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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의 지리적 위치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이로 인해 신라시대에는 왜적을 막기 위해서 이곳에 죽변성을 쌓고 수군을 상주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인들은 죽변곶에 망루와 등대를 설치하여 러시아군의 동해안 진출을 감시하였다. 죽변곶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이 등대는 일본인이 러시안군의 침략을 감시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처음 건립되었다. 그러나 등대의 건립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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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에 시집와서 나이 마흔에 남편을 잃었다. 가정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남편이 잃고 나니 그 빈자리가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당장 먹고 살길이 또 막막해질 때 할 수 없이 다시 거리로 나갔다. 당시 생필품으로 팔리던 사카린, 성냥, 술약, 비누, 실 같은 물건을 사서 가까운 범상골, 섭실, 화성리를 돌아다니며 팔기 시작하였다. 장사가 되지 않아 고기장사를 따라다니면서 죽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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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의 죽변항은 지나간 시간동안 포(浦)에서 진(津)으로 1900년대 이후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항구로 탈바꿈하면서 오늘날에는 동해안의 어업기지로서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죽변의 이러한 변화는 어디서 기인되는 것일까. 『한국수산지』에는 죽변의 입지적 조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죽변의 용추갑은 높은 언덕을 정점으로 해서 북서쪽보다 남동쪽으로 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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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竹邊), 대나무로 이루어진 곳이라는 뜻으로 지명에서 이곳에 과거 또는 현재 대나무가 많았거나 많이 자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죽변 일대에서도 죽변등대가 위치한 죽변곶은 그 주변이 모두 대나무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은 연신 대나무숲을 흔들어대고, 숲 사이로 들어가면 마치 대나무숲에 들어간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지금은 관광단지화가 된 이곳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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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1리에 있는 성황신을 모셔놓은 제당. 울진에서 동서 방향을 연결하는 주 도로인 십이령 길은 출발 지점이 울진·죽변·흥부이다. 출발 지점에 따라 노정이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결국 북면 두천리를 지나 바릿재와 샛재를 거쳐 봉화로 향하는 길이다. 즉, 바릿재 아래에 있는 두천리를 거치는 길이 울진과 경상북도 내륙인 봉화에 이르는 주요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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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함경남도 호원군 삼호면 사람들은 한 배에 동네사람 82명이 타고 피난을 떠났다. 죽변을 떠나서 포항에 도착하지만 해병들의 저지로 정착하지 못하고 구룡포에서 한 달여를 보내고 다시 죽변으로 옮겼다. 당시 70여명의 함경도 사람들은 죽변4리 등대 아래에 정착하였고, 이곳에 하꼬방이라 하는 쪽방을 짓고 처음 그들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제주도 잠녀들의 판자촌이 늘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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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에서 나무나 대나무 따위를 뗏목처럼 엮어 고기잡이에 사용하는 원시적인 배. 떼배는 예로부터 수심이 얕은 연안 어장에서 해초를 거두거나 고기를 잡는 데 이용하였으며, 돛이나 다른 동력을 이용하지 않고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노를 저어 움직인다. 삼국시대부터 가벼운 통나무를 뗏목 모양으로 짜서 나무 자체가 가진 부력만을 이용하는 떼배가 쓰였다. 이것은 물이 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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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부터 뛰어난 나잠기술로 이미 동해안의 미역 채취에 대부분은 잠녀들이 독점한다. 정어리, 오징어, 꽁치와 더불어 동해안에서 주요 어획물인 미역은 각 마을에서 중요한 생산물로써 관리되고 있었다. 동해안을 따라 나잠업은 주로 미역과 우뭇가사리, 전복, 멍게 등을 채취를 주 목적으로 하며, 여기서 주요 생산물은 미역이다. 잠녀들이 작업하기 전 죽변에서 미역채취는 낫대(끝에 낫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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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 1593년 경상북도 울진군 덕천리 마분동에서 김언륜이 왜군과 벌인 전투. 김언륜은 1565년(명종 20) 북면 고목리 지장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동네 지장서재(智藏書齋)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틈만 있으면 병서 읽기를 좋아하였다. 1592년(선조 25) 27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듬해 8월 울진에서는 고읍성 전투와 덕천리 분투골 전투가 치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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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지역의 별신굿은 주로 해안 지역 마을에서 행해진다.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며 올리는 별신굿은 마을의 경제력에 따라 10년, 4년, 5년 등 그 주기가 차이가 있다. 별신굿이 진행되는 곳에서는 해당 마을 주민뿐 아니라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참여하는 축제이며, 모든 비용은 마을의 노반계 또는 어촌계 등 공동 조직의 기금으로 운영된다. 2001년까지 울진에서 별신굿은 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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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 70여명 중 60여명은 바다에서 활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처음 죽변에 왔을 때 어선의 규모와 함께 수산업의 규모를 보고 혀를 찼다고 한다. 특히 선주의 경우 ‘이곳의 수산업은 수산업이 아니지’라는 말을 뱉을 정도로 특히 어선의 규모와 함께 명태의 어획량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피난민들이 죽변으로 오기 전 거주한 함경도는 명태잡이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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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이 백두대간의 산맥으로 가로막힌 울진에서 서울로 가기 위한 길은 남쪽과 북쪽 해안도로를 따라 연결된 도로를 통해서이다. 서쪽으로는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야 하는데, 열두 개나 되는 산길을 넘어 봉화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그 길이 바로 십이령이다. 십이령은 울진을 동서 방향으로 연결하는 도로로 그 출발지점은 울진, 죽변, 흥부에서 각각 시작된다. 출발 지점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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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반대하여 일어난 시민운동. 반핵운동은 한울원자력발전소가 주민의 의견 없이 일방적으로 건설된 이후 환경 문제와 관련된 생계 문제가 발생하면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이후 핵발전소의 증설과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선정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울진군에서 조직적으로 반핵운동이 나타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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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 거주하고 배를 모는 생업을 하는 이들에게 뱃고사는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 내용과 절차에 있어서 차이는 있지만 출어를 시작하기 전 택일을 하여 뱃고사를 올리고 거친 바다와 바람에 자신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바람은 어디서나 유사하게 나타난다. 함경도의 아바이들과 죽변 선주민들이 공히 뱃고사를 올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그들의 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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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홍원군 삼오면 삼성리가 고향인 황종덕은 전쟁이 터지면서 서른살에 죽변으로 온 그는 부산에서도 거제도에서도 살다가 서른네살에 죽변에 정착하였다. 북한에서 결혼하여 다섯살된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 군대를 갔다. 나이가 많아서 군대에 면제가 될 줄 알았는데 군대에 가라는 명령이 떨어져서 당시 2기생으로 일본인의 손에 이끌려 군대에 갔다. 함경북도 회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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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에 있는 고려 전기 토축 읍성지. 산내성에 관한 사료로는 『울진군지』 울진읍 성곽 산내성조에 있다. 죽변면에 있는 장산성(長山城)이 신라 말 왜구에 의해 폐허가 되자, 고려 초에 장산성에서 내륙으로 서쪽 5리 떨어진 산내성에 축성하여 이읍(移邑)하고 군민을 위무하여 이산(離散)되었던 민심을 결집하여 대읍을 이룩하였다. 성종 때 삭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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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의 새벽은 어판장에서 울려 퍼지는 호루라기 소리에서 시작된다. 동이 트기 전 아직 어둠이 깔린 시간 죽변항에는 오징어 또는 게를 잡기 위한 출항준비로 분주한 어선들의 밝은 불빛으로 대낮을 방불케 한다. 작게는 3톤 크게는 6톤에 이르는 대게잡이 자망어선과 오징어잡이 어선은 해무를 가르며 선단을 이루고 바다를 향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검은 바다 위 불빛들이 앞서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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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만의 위치와 형상이 어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되지만, 이것만큼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죽변항 일대의 생태적 특징이다. 동해안의 어로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해류는 쿠로시오의 지류인 쓰시마 난류와 한류계인 오야시오의 지류인 북한한류이다. 쓰시마 난류의 일부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는데 여름철에는 함경북도 연안까지 이르고, 겨울철에는 울릉도 죽변 근처에 머문다. 이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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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4리의 잠녀들은 죽변어촌계원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는다. 이는 오랫동안 그들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기 위한 노력에서 기반된 것이며, 나잠기술로 많은 양의 미역을 채취하고 그 수익을 어촌계와 공동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때로는 잠녀들이 ‘죽변의 두통거리’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이는 잉여자금에 대한 분배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잠녀는 죽변어촌계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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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가 부족한 산골에서 여옥란 역시 선질꾼이 떠난 자리에서 개간한 농지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여옥란이 부르는 오늘날 화전을 ‘산전’이라 부른다. 갈아 먹을 땅이 부족하니 해마다 산에 불을 놓아 산전을 일구었다. 산전은 개인 산에서는 할 수 없고 국유림에서만 가능하였다. 국유림도 산전은 국가에서 금지해 놓은 일이니 몰래 몰래 숨어서 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먹고 살기 힘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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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 지역에서 비즈니스, 관광 또는 휴양 등의 목적을 가진 여행객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시설. 숙박시설은 호텔, 여관, 콘도미니엄, 유스호스텔, 휴양소, 연수원 등을 말한다. 숙박업은 관광객의 여행기간 중 가장 중요한 숙박과 휴식의 장소로서 다른 관광사업보다도 그 비중을 크게 차지한다. 최근 국제회의 및 접대장소로서 그 범위가 매우 확대되고 다양화됐지만, 본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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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부터 울진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선인들은 ‘등허리 긁어서 안 닿는 곳’이라는 말로 찾아가기 힘든 울진을 표현하였다. 국도 7호선은 지리적으로 오지에 위치한 울진을 연결하는 주요한 연결 도로이다. 경상북도의 동북단이라는 위치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동해안의 남쪽과 북쪽을 잇는 주요한 연결망인 국도 7호선의 중심점에 울진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국도 7호선은 동해안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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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일본인 이주촌이 생긴 죽변은 울진군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각종 공공시설이 일찍 들어섰다. 항만시설은 물론이며 전기, 상하수도 등과 함께 어업에 관련된 현대적 장비들이 등장하였다. 일본 시마네현 어민이 울진으로 집단적으로 이주하는 1920년대에는 1880년대부터 일본에 도입된 서구의 선박과 새 기술을 도입한 현대화된 어선들이 대거 유입되었으며, 죽변에는 당시 원주민들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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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동해안의 어업은 정어리가 풍년이 되면서 약 10년 동안 번성기를 맞이한다. 일본인 이주와 더불어 정어리의 풍년은 죽변항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당시 죽변에서 잡힌 많은 정어리들로 정어리 기름공업이 발달하였는데, 1940년경에는 어민을 비롯한 유지제조, 운반, 판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동해안 일대에만 10만명에 달했다. 죽변항에도 정어리와 관련된 공장이 10여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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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을 시조로 하고 김계근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울진군의 세거 성씨. 영양김씨는 고려 때 전서를 지낸 김유철을 시조로 하는 계열과 신라 때 귀화한 김충을 원조로 하는 계열이 있다. 울진 지역에 세거하는 영양김씨들은 김충을 원조로 하는 일파이다. 영양김씨는 임진왜란 때 죽변에 정착해 현감을 지낸 김계근이 입향조이다. 역시 현감을 지낸 김응호와 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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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결혼한 후 거일2리로 들어온 손춘권은 처음에는 시집에 들어가 살았지만 곧 분가를 하게 되었다. 미역짬을 분배할 때 집이 없으면 미역짬을 분배받지 못하는데 시집에 계속 살게 되면 시부모님 몫의 미역짬만을 분배받기 때문이다. 분가한 이후 손춘권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남편 김억수는 원양어선을 탔기 때문에 한번 뱃일을 나가면 몇 개월씩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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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에서 온 선주들은 그곳에서 지낸 용제를 기억한다. 용제는 매년 수조망이 시작되면 선주들이 모여서 날을 받고 ‘제주집’을 선정한다. 수조망의 숫자만큼 추렴하여 용제를 모시는데, 용제 전날 선주들은 풍어기를 들고 나와서 제장을 꽂아 둔다. 하루 전날이 되면 밤을 새워가며 소를 잡는데, 이때 제사는 역원들이 맡는다. 용제일 전날 ‘용제터’에 가서 현장에나 소나 돼지를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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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명도리에 있는 수령 300년의 굴참나무. 명도리 굴참나무의 높이는 24m, 가슴높이 둘레는 4.1m이다. 울진 명도리 굴참나무는 마을의 정자나무로 이용되고 있다. 1982년 10월 26일 경상북도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였다. 명도2리 아산동 세거리로 가는 길목의 노영락 집 옆 산자락에 소나무와 섞여 자란다. 세거리는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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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 서울에서 봉화에 이르는 길이 간선도로로 승격되어 7대로가 형성되면서 울진군 북면에서 봉화를 연결하는 교통로인 십이령 길이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 도로가 되었다. 울진의 흥부장·읍내장·봉화의 내성장 등 장시가 열리면서 이들 장시가 십이령 길을 통해 연결되었다. 십이령을 넘나들며 울진과 봉화 지역의 장시를 장악하였던 보부상이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퇴조하자 그 역할을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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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에 속하는 행정구역. 본래 울진현(蔚珍縣)[울진군]의 소재지로서, 군의 아래쪽은 하군면(下郡面)[일명 하현내면]이라 하여 옥계(玉溪)·홍시(紅矢)·월변(月邊)·상토(上吐)·하토(下吐)·지로(旨老)·공세(貢稅)·현내(縣內) 등 12개 동을 관할하였다. 1914년 상군면(上郡面)[일명 상현내면]의 구만(九萬)·청고(靑皐)·성저(城底)·가원(可原)·온곤(溫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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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연안어업도시로 성장한 죽변면의 죽변리는 4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마을에서 토박이를 찾을 수 없다. 인구는 많지만 상대적으로 유동인구가 많은데, 이는 죽변항의 경제생활과 역사적 환경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면서 나타난다. 죽변의 경우 일본인의 이주와 더불어 1900년대 초반 대거 일본인이 들어와서 마을에 정착하였지만 50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들이 떠나면서 동반적으로 경제생활을 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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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에서 벌어진 원주진위대와 일본군 간의 전투. 1907년 일본이 조선 군대의 해산령을 내리자, 그 해 8월 이에 불복한 원주진위대는 민긍호(閔肯鎬) 특무의 인솔하에 일본군경과 항전하였다. 선봉대는 제천에서의 일본 병사와 교전, 단양에서의 일병과의 격전, 다시 영동의 의병과 합세하기 위해 9월 울진으로 오는 도중 봉화 각화사(覺華寺)에서 일본군과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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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에서 이곳으로 육군후생사업의 일환으로 오징어를 팔고 건조하기 위해서 올라왔다. 오징어를 잡아 건조해서 파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떠돌아다니는 그들이 이곳에 와서 오징어를 잡아 건조하기 위해서 육군들과 함께 올라왔다. 또 떠나야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배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있었다. 그런데 그 해 오징어가 많이 잡히지 않고 배에서 할 일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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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의 행정구역 변천을 살펴보면 1906년까지는 울진군 근북면에 속하였다. 1915년 울진지구 하군면에 병합하여 삼화면에 속한다. 이후 1917년 울진면에 속하고, 1979년 울진읍으로 1986년 대통령령 제1187호로 죽변면이 되었다. 1906년부터 1986년 분할되기 전까지 죽변은 독립된 행정구역이 아닌 근북면 또는 울진읍에 소속된 것으로 분리된 확실한 통계를 확인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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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에 일본인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83년 재선국일본인민통상상정(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이 체결되면서 일본인의 출어가 합법화되고, 1889년 조선·일본양국통어장정(朝鮮日本兩國通漁章程)의 체결로 일본인의 자유로운 통어가 권장되면서 본격화되었다. 1908년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고 어업법이 제정된 후에는 일본인의 수산업 참여가 더욱 활발해지는데, 이는 협정과 어업법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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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 죽변은 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특히 인구변동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심하게 나타난다. 공동체 영역에서 마을을 이루며 거주하는 이들은 약간의 인구 이동이 일어나지만 기본적으로 3대 이상이 거주하거나 또는 장기적으로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옆집의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이웃의 근황에 대해서 먼 친척보다도 더 자세하게 알고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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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의병. 본관은 울진(蔚珍). 이명은 군칠(君七). 장말익(張末翼)의 24세손으로 아버지는 장사묵이다. 1882년 일본 어선 5척이 죽변 앞바다에 들어와 불법으로 해삼을 잡자 울진유진소에서 명령을 받은 중군장 최재린이 포병 50명을 이끌고 죽변곶 죽림에서 잠복하였다. 어선 3척이 죽변항에 상륙하려 하자 포병들이 사격을 가하여 일본인 31명을 사살하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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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주인리 석수동에 있는 구석기시대 유적. 현재 경상북도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매우 적다. 몇 편의 글에서 경상북도에서 출토된 구석기에 대해 매우 소략하게 언급했을 뿐, 유적의 발견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최근 동해안의 구석기 유적을 조사하면서 울진 주인리 유적·영해 삼계리 유적·포항 임곡 유적을 발견함에 따라 경상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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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에 속하는 법정리. 대나무가 많은 바닷가라 하여 죽빈이라 하다가, 뒤에 죽변동이 되었다. 본래 울진군 근북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1916년 3월 1일 봉수동이 통합되어 죽변리라 하여 울진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4월 1일 울진읍에서 죽변면이 분리, 승격되었다. 죽변리는 죽변1리에서 죽변5리까지 다섯 개의 행정리로 분리되어 있다. 죽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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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성황사에서 정월대보름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제사. 성황사는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297-2번지에 위치하는데, 죽변1리·죽변2리·죽변4리·죽변5리와 후정3리 주민들의 마을 제당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인근의 죽변3리[봉개마을]와 봉평리·후정리 주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사실상 죽변면을 대표하는 마을 제당으로 기능한다. 서낭고사는 죽변어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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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에 있는 신라시대 토축 성지. 죽변리 죽변성지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 때 신라 국경인 소공령(召公嶺)과 해상에서 오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토축으로 성을 조성하고 수군 2,000명을 주둔시켰다는 내용이 전해온다. 죽변성지가 위치한 일대는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적을 관측하고 방어하기 위한 최적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내륙에서 바다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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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에 있는 행정구역. 대나무가 많은 바닷가라 하여 죽빈이라 하다가, 뒤에 죽변이 되었다. 본래 울진군 근북면(近北面)에 속한 지역으로서, 1953년 2월 13일 울진군 울진면 죽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17년 11월 1일 삼화면(三和面)이라 하던 것을 울진면으로 고치고, 1979년 5월 1일 울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4월 1일 죽변출장소가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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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이주민들의 직업과 계층을 살펴보면 선주가 3명, 가이선 어로자가 15명, 나머지는 선원이었고 10여호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약 70여명의 이주민 중에서 가이선 어로자는 15명으로 그들의 가이선에 대해서 죽변 사람들은 함경도 사람들은 수산기술이 좋다는 평가를 한다. 가이선은 뎃마라고 부르는 작은 어선으로 ‘채경선’ 또는 ‘수경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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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잠녀가 이곳에 오기까지는 한국사의 대외적인 사실과 연결된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 제주 지역에 일본인의 출입이 잦아진다. 당시 일본은 자본주의에 따른 근대공업의 발전과정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를 가까운 제주도에서 유출하였다. 인구의 감소와 함께 일본 연안의 해산물 감소에 따른 제주도 해산물 수요의 증가에 의해 나잠업을 하는 인구가 급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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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죽변3리에 있는 공원. 죽변(竹邊)은 대나무가 많이 자생한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특히 이곳에 자생하는 소죽(小竹)은 화살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어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보호하였다고 한다. 죽변은 우리나라 동해안 항로의 중간 지점이며, 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울릉도와는 직선거리상 가장 가까운 곳이다. 동해안에서 호미곶을 제외하고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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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내리에 있는 천주교 안동교구 소속 천주교회.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박해를 피해 충청도에서 울진군 울진읍 읍내리로 이주해 온 신자들이 거주하면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후 1957년 5월 24일 춘천교구 소속 삼척천주교회 울진공소가 설립되었다. 1958년 5월 24일 울진공소가 울진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울진군 울진읍 읍내리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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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숙종(肅宗) 28년(1689) 5월 기유(己酉) 기사에는 ‘울진 죽변진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로 갔다’라는 기사가 있다. 당시 울릉도로 가기 위한 주요 항로로서 죽변이 이용되었음을 대변해 준다. 그러나 일찍이 울릉도로 가기 위한 해로로 죽변이 이용되었음은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바는 아니다. 실제로 죽변항은 울릉도와 80마일(128㎞)의 거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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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4리 사람들은 북으로는 함경도, 남쪽으로 제주도 그리고 울진의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다양하게 산다고 하여 유엔총회라 부른다. 남쪽 끝 제주도에서 온 사람과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 중간 정착지 죽변에서 만나 함께 살아갈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아마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이 이곳에서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마을을 이루면서 살아갈 것을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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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리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 항출도산 봉수대는 봉수제가 운영되던 조선시대에 강원도 울진현에 소속된 4개소의 봉수대 가운데 1개소이다. 남쪽의 죽변곶 봉수대, 북쪽의 삼척 가곡산 봉수대에 응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긍출도산(亘出道山) 봉수로 표기되어 있다. 항출도산 봉수대는 나곡리 나실마을의 북쪽에 있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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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 지역 바닷가를 중심으로 해수욕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곳. 울진군에서는 1984년 죽변 봉평해수욕장과 기성 구산해수욕장을 개장한 이래 1997년까지 6개의 해수욕장이 추가로 개장되어 1998년 현재 총 8개의 해수욕장이 개장되어 있다. 특히 북면 나곡리의 나곡해수욕장은 군내 8개 해수욕장 중 가장 넓은 면적의 백사장을 자랑하고 있으며, 기성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