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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릿재와 샛재를 넘어 두천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E020101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
집필자 신상구

서쪽이 백두대간의 산맥으로 가로막힌 울진에서 서울로 가기 위한 길은 남쪽과 북쪽 해안도로를 따라 연결된 도로를 통해서이다. 서쪽으로는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야 하는데, 열두 개나 되는 산길을 넘어 봉화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그 길이 바로 십이령이다. 십이령은 울진을 동서 방향으로 연결하는 도로로 그 출발지점은 울진, 죽변, 흥부에서 각각 시작된다. 출발 지점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울진에서 출발]

울진-구만리-외고개-천고개-바릿재-샛재-너삼밭재-저진터재-새넓재(한나무재)-큰넓재-고채비재-맷재-배나들재-노룻재-소천

[죽변에서 출발]

울진 죽변-돌재-나그네재-바릿재-샛재-너삼밭재-저진터재-새넓재(한나무재)-큰넓재-고채비재-맷재-배나들재-노룻재-소천

[흥부에서 출발]

울진 흥부-쇠치재-세고개재-바릿재-샛재-너삼밭재-저진터재-새넓재(한나무재)-큰넓재-고채비재-맷재-배나들재-노룻재-소천

출발은 차이가 있지만 바릿재를 넘어 샛재를 지나 너삼밭재에 다다르고 이후의 길은 모두 동일하다. 바로 이 너삼밭재가 있는 곳이 두천리이며 울진에서 출발하여 소천으로 향하는 길다면 긴 여정동안 선질꾼들이 처음 여장을 풀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두천리이다.

선질꾼들이 여장을 풀 수 있었던 두천리는 선질꾼들이 다니면서 새롭게 만들어 진 곳은 아니다. 『여지도서(與地圖書)』를 보면 울진의 도로를 소개하는데 ‘관문(官門)으로부터 동쪽으로 현내진(縣內津)까지 5리이고 대해(동해를 지칭함)에 이른다. 관문 서쪽으로 두천원까지 30리이고, 두천원으로부터 소조원까지 40리이다.’기록되어 있다. 서쪽으로 가는 길목에 두천원이 있으며 이곳이 중간 도착점이 되면서 출발점이 되었던 곳으로 보인다. 원은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과의 공문서 전달과 행정추진기능을 담당하였지만 임진왜란 이후 새로운 통신수단이 발달하면서 관공서적 원은 폐쇄되고 숙박업 등 서비스 기능으로써 원이 발달하게 되는 두천원은 후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옛날 십이령 고개길은 국도에 속했다고 하니 이곳에 원이 생기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생각된다.

두천 주막거리에는 1970년대 주막이 철거되기 전까지 약 15가구의 주막들이 있었으며, 날마다 이곳을 지나가는 선질꾼들로 늘 주막은 붐볐다고 전해진다. 1974년 영주-울진간 국도 36호선이 완성되고 물류이동을 위한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더 이상 십이령 고개길은 선질꾼들의 발걸음에서 멀어졌다. 이후 사람들이 뜸하게 되면서 결국 이곳도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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