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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375
한자 竹邊里城隍祠祭祀
영어의미역 Religious Service of Seonghwangsa Shrine in Jukbyeon-ri
이칭/별칭 향나무 성황당,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297-2
집필자 김도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제사
의례시기/일시 음력1월 15일
의례장소 서낭당 내
신당/신체 당집|위패|향나무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성황사에서 정월대보름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제사.

[개설]

성황사는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297-2번지에 위치하는데, 죽변1리·죽변2리·죽변4리·죽변5리후정3리 주민들의 마을 제당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인근의 죽변3리[봉개마을]와 봉평리·후정리 주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사실상 죽변면을 대표하는 마을 제당으로 기능한다. 서낭고사는 죽변어촌계에서 주관하고 있다.

죽변리 성황사는 천연기념물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이 500여 년 이상 된 향나무를 신수(神樹)로 하며, ‘향나무 성황당’이라고도 불린다. 성황사 내부에는 중수와 관련하여 1893년·1938년·1981년에 제작한 현판들이 보관되어 있어 연혁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1893년에 제작된 현판에서는 당시 이 지역 유림들의 자치 조직이 성황사 운영과 중수에 적극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해안의 마을 제당은 할아버지 서낭과 할머니 서낭으로 구분하여 통상 두 개가 있는데 비해, 죽변리 성황사는 할머니 서낭이 없이 죽변리 성황사만 있다. 원래는 할머니 서낭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할머니 서낭에서 행하였던 여러 기능 중 용왕제를 지내 풍어를 기원하는 의례만 간단하게 남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조밥’을 하여 진설하는 것은 풍어를 기원하는 상징성을 보여준다. 또한 부정풀이 때 대부분의 마을에서 볏집을 태운 후 그 위를 지나는데, 죽변에서는 향을 피워 그 위를 지난다. 이는 시대 변화에 따른 부정풀이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연원 및 변천]

『울진군지』에 의하면 울진 지역에서는 옛날부터 어민들을 위해 당집을 지어 성황신을 모셨는데, 1935년에 죽변 후릿개 산 밑에 있던 성황사를 현재의 죽변 향나무 옆으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가 현지 조사를 해보니까 동해안에서 해사(海事)에 종사하는 마을에는 할아버지 당[혹은 본당]과 할머니 당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할머니 당이나 할아버지 당 어느 한 쪽의 기능이 약해져서 폐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 합사를 하여 서낭고사를 지낼 때 제수를 두 상 차려 놓는 예가 매우 많다.

죽변리 성황사의 경우 제물을 두 상 차려서 할아버지 서낭과 할머니 서낭에게 올린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합사된 것으로 보이며, 이 과정에서 후릿개산 밑에 있던 할머니 당이 향나무 옆에 있던 할아버지 당으로 합사된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중수와 관련하여 걸려 있는 현판에 성황사의 이전과 관련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마을 사람들은 동제 올리는 것을 서낭제 또는 제사 지낸다고 하며, 서낭제를 지낸 후 인근 바닷가에 가서 용왕제를 올린다. 서낭제는 마을 이장들이 주관하였으나, 이들의 관심이 점점 없어지면서 지금은 죽변어촌계에서 자체 자금 등을 이용하여 주관하고 있다. 이 어촌계 계원은 190명으로 죽변항에 정박한 모든 배의 선주들이 참여하고 있다.

성황사 중수와 관련하여 제당 내부에 걸려 있는 현판과 죽변어촌계장 방학수의 진술을 토대로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죽변리 성황사 중수기의 현판은 5개로 성황사 내부 좌우 벽에 걸려 있는데, 그 제작 연도를 알 수 있는 것은 3개이다. 나머지 2개는 1981년 중수할 때 협찬자 명단을 이어서 적은 것으로 보인다. 제일 먼저 만들어진 것은 1893년에 만든 것으로, 11번째 줄에 ‘······복원중수지후극면고명지(伏願重修之後克面高明之)······’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현판은 중수 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이전에도 성황당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중수와 관련하여 중수기는 김현순이 쓰고, 전 진장(鎭將) 김두욱·집강(執綱) 임응식·존위(尊位) 임희옥·두원(頭員) 정운성·황한상·최용규·장병항·동장(洞長) 안정호·김두칠·장세필·최우혁·김만중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당시 죽변리 일대에서 유지로 활동하였던 세력들로 보이며, 성황사의 중수와 운영에 적극 참여하여 지방에서의 세력을 과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두 번째로 만들어진 것은 1938년 11월로 기록된 중수 현판으로 구장(區長)·농좌상(農座上)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개인과 죽변수산주식회사·죽변산업주식회사 등에서 성금을 희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81년 2월 24일에 만든 현판에는 죽변리 1구·2구·4구 대표·죽변리수산업협동조합장·성황사 유지 기금, 기타 점포 또는 개인이 협조하여 중수하였음을 기록하였는데, 개인적으로 돈이나 쌀을 희사한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즉 죽변리 성황사는 1893년 중수 이후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중수하였으며, 1981년에는 마을 이장단 등을 중심으로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죽변어촌계장 방학수의 말에 따르면 현재의 죽변리 성황사는 1999년 9월에 죽변어촌계에서 주관하여 전면적인 개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울진의 죽변리 성황사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로 벽체는 나무를 사용하였으며, 지붕은 맞배기와지붕이다. 기둥은 향나무를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출입문은 좌우 여닫이 문으로 태극 문양을 그려 놓았다. 내부 정면에는 제단을 설치하여 ‘성황신위(城隍神位)’라 쓰인 위패를 봉안하였다. 내부의 좌우 벽에는 성황사 중수와 관련하여 주도한 사람들과 협조자들을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제당의 명칭은 ‘성황사(城隍祠)’로서 건물 정면에 편액을 걸어 두었다. 제당의 옆에는 수령이 500여 년인 향나무가 있는데, 신목(神木)으로 여겨 동제 전에 성황사와 함께 금줄을 둘러놓았다.

[절차]

1. 동제 준비

1) 제관 선정

제관은 어촌계원 중에서 생기복덕을 보아 섣달 말에 선정한다. 울진 지역에서는 제수 준비 등을 하는 도가 집을 제관 댁이라 하는데, 죽변에서의 제관은 도가를 의미하여 성황사 청소·금줄 치기·황토 뿌리기·제물 준비 등을 주관하며, 서낭제를 지낼 때 초헌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제관만 생기복덕을 봐서 선정하고, 나머지 참여자는 이와 무관하게 참여할 수 있다.

2004년 서낭제에서 도가는 어촌계 감사 이명길이 하였고, 어촌계장 방학수가 아헌을 하였으며, 어촌계 간사 윤명숙이 종헌을 하였다. 서낭제를 준비하는 제관이 제수를 준비 중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제관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조용히 근신한다.

2) 제비(祭費)와 제수(祭需) 준비

2004년 서낭고사를 위한 제수 비용은 80만 원을 책정하였는데, 죽변수협에서 일부 지원금을 받아 어촌계 기금으로 조달하였고, 개인적으로 성금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에 대하여는 개인적인 소지도 올려준다. 제물은 1월 13일[음력]에 주로 시장에서 제수를 구입하였는데, 성황사에 두 상을 진설해야 하므로 모든 제수 물품은 두 개씩 구입하였다.

옛날에는 좋은 어물이 잡히면 성황고사에 쓰라고 희사하여 진설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제수를 구입할 때 주로 죽변 앞바다에서 나는 것으로 당일 위판하는 것을 바로 사서 선도를 유지하고, 싱싱한 생물이 없는 것은 냉동된 것을 구입하여 사용한다고 하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관인 이명길에 따르면 술을 서낭제 전에 담아서 사용한 것을 본 적은 없다고 한다. 성황사 제의에서는 정종을 사용하고, 용왕제에서는 막걸리를 준비하여 올린다. 쌀은 시골 할머니들이 갖고 오는 좋은 것으로 준비하는데, 메를 짓고, 떡을 하는데 사용하였다. 떡은 백설기로 세 되를 하는데, 옛날에는 시루에 했으나 지금은 방앗간에서 만들어 두 개 크기로 포장을 하여 진설한다. 용왕제에서 조밥 한 되를 하여 진설하는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제수를 만들 때 주의할 점은 간을 보면 안 되고, 전은 명태전과 산적을 준비하였다. 나물은 8가지인데, 콩나물·도라지·고사리·무나물·미역·냉이·시금치·숙주나물이다. 돼지머리도 진설하는데, 고사 후 삶아서 술안주로 하였다. 탕은 육탕이고, 요즘 들어 조기를 진설하는데, 모든 생선의 꼬리를 잘라내어 약간 말린 후 쪄서 사용한다. 포는 오징어포를 진상하였다. 제관 댁에서 제수 목록을 작성한 후 제물을 구입하는데, 만들어진 제수는 제사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와서 운반하였다.

제기(祭器)는 별도로 보관하는 것이 없어 제관의 집에 있는 것을 이용하였다. 2004년에 제수를 구입하는 데 650,000원이 소요되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30여 명의 지역 인사들에게 성황사 제사 안내장을 발송하였다. 이에 소요된 경비는 8,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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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004년 구입 제수(祭需) 목록

2. 동제(洞祭) 진행

동제 하루 전인 2월 3일 청소를 한 후 금줄을 친다. 전에는 제관 댁에도 금줄을 걸었으나, 지금은 걸지 않고 성황사와 신목인 향나무에 금줄을 건다. 제관 댁에서 준비한 제물은 2월 4일 밤 10시 20분에 서낭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해 준비된 차량으로 이동하여 10시 27분경 성황사에 도착하였다. 성황사에 도착한 후 입구와 성황사 건물 출입구 앞에 부정씻기용 향불을 피워 그 위를 10시 30분경 지나갔다.

제물 진설은 밤 11시 정도까지 하였는데, 제단에 한지를 편 후 할아버지 성황과 할머니 성황을 위해 두 상을 차렸다. 진설하는 과정에서 준비한 제물에 비해 제단이 작아서 과일 일부[수박·오렌지]는 제단 아래에 진설하였다. 서낭 제사는 2월 4일 밤 11시 8분경에 시작하였는데, 구체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초헌은 제관 이명길이 하였는데, 부부신이어서 두 잔을 먼저 올린다. 이후 어촌계장 방학수가 축을 하고, 헌작 후 재배하였다. 이후 메의 뚜껑을 열어 삽시한 후 다른 제관이 첨작한 후 재배하였다. 나물을 내리고 산물을 올리고 재배한 후 메를 세 수저 떠서 산물에 넣고, 메의 뚜껑을 덮은 후 합동 재배하였다. 제사 후 개인적으로 잔을 올릴 사람들이 들어와서 준비해온 술을 올렸다. 주로 배를 가지고 있는 선주들이 잔을 올렸는데, 당일에 외부 인사로 참석한 번영회장 오계동, 울진군의회 전완철 의원 등이 와서 잔을 올렸다.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참석한 사람들은 제당 밖에서 조용히 대기하였다. 개인적으로 잔을 올린 후 서낭당 옆의 영화보살이 제당 밖에서 축원 독경을 하며 소지를 올려주었는데, 제관이 먼저 올리고, 어촌계장 등이 연이어 올렸다. 삼척의 대진 성황당에서는 무당이 부정치기를 하고, 독경을 하며 서낭고사를 주도하는데, 죽변리 성황사에서는 보살의 역할이 소지 올리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소지를 올린 후 용왕제를 지내기 위해 제관과 어촌계장이 제물을 들고 인근 바닷가로 가는데, 이때는 제사를 주도한 제관과 아헌·종헌·집사만 참석한다. 제물은 별도로 준비한 조밥, 막걸리 1병, 오징어 포, 배, 초 2개, 향을 준비한다. 바닷가에 신문지를 편 후 그 위에 제물을 진설하였다. 용왕제를 지낼 때는 제물에 대한 진설을 한 후 제관이 막걸리를 한 잔 올린 후 재배하고, 조밥을 한지에 싼다. 이때 조밥은 세 숟가락씩 세 장의 한지에 각각 싸서 다른 제물 옆에 둔 후 제관이 재배한다. 재배 후 용왕님께 올리기 위해 마련한 술과 한지에 싼 조밥, 제물을 바다에 헌식하는데, 가져온 제물 모두를 헌식하였다.

[축문]

축문은 제관이 초헌으로서 두 잔을 헌작한 후 어촌계장이 고축(告祝)을 하였다. 한글 축문을 사용하는데, 그 내용은 갑신년 한 해 죽변항 어민들에게 무사고와 만선의 기쁨으로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하며, 더 나아가 죽변면 주민들의 화합과 무궁한 발전을 내려주시길 기원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세차 갑신년 정월 경자월 십사일 계축일 제관 대표 이명길 감소고우 남성부주 해동 대한민국 경북 울진군 죽변면 성황신께 지극정성 축원드립니다. 성황신이시여 합의동심하시여 정성들여 만들은 제물을 빛으로 감동하시고, 착실히 운감하시여 갑신년 한 해 죽변항 어민들에게 무사고와 만선의 기쁨으로 늘 웃음꽃이 피도록 복을 내려 주시고, 죽변면에 화합과 무궁한 발전을 내려주시길 축원으로 제물을 올립니다. 갑신년 정월 십사일 제관 대표 이명길 상향”

[부대행사]

서낭 제사를 지낸 후 제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과 번영회장·군의원·면장·선주들이 어촌계 사무실로 가서 음복하고, 제물과 술을 나눠 먹으며 환담하고 결산하였다.

개인적으로 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설날 새벽 4시 경에 만선기를 꽂거나 배 고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정월대보름 서낭고사 후 안택하는 예가 전에는 많았다고 한다.

죽변에서 배 성주는 1년에 한 번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는데, 실시하는 경우 주로 2월 전에 무속인을 불러서 하였다. 경비는 10만 원 정도의 수고비와 제물비로 20만 원에서 30만 원이 소요된다고 한다. 배와 집 각각 같은 제물을 마련하는데, 배 고사 후 성주를 달기도 하고 안 달기도 하는데, 안 단 경우를 허공성주라 하였다. 배에 성주를 다는 사람은 주로 조타실에 단다.

[현황]

죽변리 마을 주민들은 매년 풍어제를 올렸으나, 지금은 경비가 많이 들어서 폐지하고 서낭제만 유지되고 있다. 죽변리 성황사는 이를 관장하는 죽변리후정3리 사람들뿐만 아니라 죽변3리 봉수마을, 봉평리죽변면의 다른 지역 사람들도 중요한 일이 있거나 관광 등을 떠나기 전에 안전과 건강을 기원하는 술과 포를 올리고 떠나는 것으로 보아 죽변을 대표하는 서낭당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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