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1950년 그래도 이웃이 있었던 장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E030202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
집필자 신상구

1948년 시집 올 당시 장평은 열다섯가구가 마을을 이루며 살던 곳이었다. 여옥란이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텃골에 세 집, 무조골에 한 집, 씨시골에 한 집, 창골에 한 집, 반지에 두 집 등 이웃이라고 해도 한참동안을 걸어서 가지만 그래도 이웃이 있던 시기였다. 1968년 울진·삼척무장공비사건으로 큰 동네인 두천리로 강제로 이주하게 되면서 장평에 사람들이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은 이곳에서 이루어짐에 따라 봄이 되면 농사를 짓기 위해 집과 논밭이 있는 장평으로 돌아오고 겨울이 되면 두천리로 내려가는 것을 반복하였다. 한국전쟁에는 북한군과 한국군이 시도 때도 없이 이곳을 행군하기 일쑤였다.

지나가는 북한군들은 그녀의 집으로 쳐들어와 소를 빼앗아 가기도 하였다. 남편을 만나 결혼한 뒤 아들 둘, 딸 다섯 7남매를 낳아 길렀다. 작은 아들은 다 키워서 먼저 떠나보내 가슴에 묻고 큰 아들은 두천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평생을 함께 했던 남편은 1984년 환갑 잔칫상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그렇게 무서운 시어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3~4년 뒤 세상을 등졌다.

여옥란이 시집 온 장평은 선질꾼들이 묵어가는 주막이 있던 곳이었다. 여옥란의 시어머니 역시 장평에서 주막집을 운영하였다. 선질꾼들은 시어머니가 운영하던 주막에 들러 막걸리를 먹거나 잠을 청해 자기도 하였는데, 1940년대 그곳을 지나던 선질꾼들은 꽤 많았다고 한다. 금강송면으로 향하는 국도 36호선으로 인해 더 이상 사람들이 장평을 지나 봉화로 갈 일이 없게 되었지만 그 전만 하여도 이곳을 지나 봉화로 가다보니 장평 역시 선질꾼들이 잠시 또는 하루를 쉬어가는 중요한 장소 중 하나였던 것이다. 소금장수에서 미역과 생선 같은 해산물을 파는 선질꾼에서 소장수도 이곳을 지나간다. 삼베장수도 있었는데 그들은 강원도 영월이나 정선까지 가서 대마를 베서 찌고 난 다음에 그 껍질을 벗기고 말려서 삼껍데기를 팔려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장평으로 오는 선질꾼들은 그나마 발이 빠른 사람들이다. 울진장과 죽변에서 출발한 선질꾼들과 길손들은 두천리 주막거리에서 머물기 일쑤인데, 그들 중 그래도 재바르고 발이 빠른 선질꾼들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장평까지 와서 쉬었다고 한다. 이보다도 더 재바른 사람들이 장평을 지나 구두들, 반재까지 올라가서 목을 축이고 짐을 풀었다. 그렇게 많은 선질꾼들이 주막에 머물렀지만 그들을 가까이 볼 수는 없었다. 호랭이(호랑이)같은 시어머니는 선질꾼이나 도부장수들이 묵는 방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