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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판장의 강아지도 지전을 물었던 시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D010205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죽변4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명동

1930년대 동해안의 어업은 정어리가 풍년이 되면서 약 10년 동안 번성기를 맞이한다. 일본인 이주와 더불어 정어리의 풍년은 죽변항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당시 죽변에서 잡힌 많은 정어리들로 정어리 기름공업이 발달하였는데, 1940년경에는 어민을 비롯한 유지제조, 운반, 판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동해안 일대에만 10만명에 달했다. 죽변항에도 정어리와 관련된 공장이 10여곳이 넘었다. 당시 동해안의 정어리 풍년에 대해서 동아일보 1923년 10월 31일자 신문에서는 ‘요사이 성진 부근의 바다에는 난데없이 고기떼가 몰려와서 손으로라도 건질 만한 형편이므로 성진시민들은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해안에 나가 그것을 주워 들이는 형편이다’라고 알린다. 1911년 6,600M/T였던 정어리 어획고는 1937년 2,100,000M/T로 약 36배가 증가하였으니, 말 그대로 동해안 바다는 ‘정어리반 물반’으로 채워졌다. 당시 정어리 풍년에 따른 어가소득의 증가로 울진에서 죽변을 이르기를 사람들은 어판장의 강아지조차도 지전(돈)을 물고 다니던 시절이라 평하였다. 당시를 기억하던 사람들은 죽변에 정어리기름공장과 비료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기거하던 천막집이 즐비하였으며, 어항 주변으로는 선원과 노동자들 그리고 여기서 나온 부산물들을 얻기 위한 사람들로 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죽변의 어가소득 증가 및 어업 활성화는 1931년 죽변어업조합의 활동에서도 잘 나타난다. 오늘날 수산업 협동조합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어업조합은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이들은 대부분 가입하며, 이 어업조합을 중심으로 모든 업무가 운영되기 때문에 어업조합의 활동은 당시의 어업상황을 잘 대변해 준다. 죽변어업조합은 1923년 울진면 어업조합으로 발족하여 1931년 북면어업조합과 합병하여 설립되었는데, 이후 1934년 근남면원남면[현 매화면]을 일원으로 하는 오산어업조합과 합병하여 오산지소를 설치하였다. 울진에서는 1914년 후포어업조합(당시 평해면어업조합)이 설립된 이후 죽변에 두 번째로 조합이 만들어진다.

1923년 죽변면어업조합에 조합회원은 328명으로 당시 가입된 어선의 수는 50척이며, 총 어획고는 67,667엔(당시 어업조합은 일본인의 어업계를 기반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모든 자료는 엔으로 기록되어 있다.)에 이른다. 약 5년 뒤 1931년 죽변어업조합의 수는 417명으로 어선의 수는 170척으로 당시 후포어업조합의 어선 98척에 두 배에 이른다. 그리고 총 어획고도 66,679엔으로 후포어업조합의 55,243엔보다 10,000엔 이상 앞섰다.

정어리의 풍년과 일본인의 이주 등으로 죽변은 1930년대 이후 울진군의 가장 큰 항구도시로 성장하면서, 항시 번잡하고 현금이 오가며, 고함소리가 들리는 사람들이 숨소리가 느껴지는 항구도시로써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이주한 일본인이 돌아가고, 정어리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자 죽변항의 경기도 침체기 국면에 들어선다. 하지만 곧 오징어어업과 꽁치어업이 활기를 띠면서 다시 죽변항은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1960년대 죽변항에는 동력선 45척, 무동력선 38척이 있었으며 꽁치, 오징어, 명태, 새우, 뽈락, 미역, 방어, 게 등의 주요 어획물이 잡혔고, 4,500M/T의 어획고를 기록한다. 그리고 1968년에는 어선수의 변화는 없지만 어획고는 약 2배로 늘어나 8,846M/T에 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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