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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008
한자 儒敎
영어의미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갑규

[정의]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서 전개된 공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학문 또는 종교.

[개설]

울진은 지리적으로 본래 강원도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1963년에 경상북도로 편입되었다. 현재는 평해와 합병되어 있으나, 본래는 조선시대까지 별개의 군이었다. 1914년 일제의 지방 행정 개편에 따라 평해와 울진이 합쳐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두 지역을 현재의 울진으로 함께 묶어 조선시대 유학의 양상을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유교 전래]

울진 공립 교육의 시초는 1357년(공민왕 6) 명수학교(命修學校)라는 이름으로 반월산에 창건되었다가 1470년(성종 1) 현 평해읍 평해리로 이전하여 건립된 평해향교이다. 1484년(성종 15)에는 울진향교가 창건되었다. 이들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이념은 유학 사상을 중심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이룰 수 있는 윤리 도덕의 교육에 있었다.

조선 중기로 들어서면서 공립학교에만 의존하지 않고 사림이 중심이 되어 지금의 사립학교에 해당하는 서원을 세워 흥학(興學)을 조성하였는데, 울진에서도 서원 건립이 활발하였다. 1574년(선조 7)에는 울진현령 정구수가 선도하여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를 배향한 옥동서원(玉洞書院)을 설립하면서부터 서원은 인재 교육의 큰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1628년(인조 6)에는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서파(西波) 오도일(吳道一)을 배향한 고산서원(孤山書院)이 건립되었고, 순조 연간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석당(石堂) 김상정(金相定), 만은(晩隱) 전선(田銑)을 병향(幷享)하는 옥계서원(玉溪書院)이 건립되었다.

이 외에도 우암(憂菴) 윤시형(尹時衡)황림(篁林) 윤사진(尹思進)을 모신 몽천서원(蒙泉書院),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과 계산(溪山) 김수근(金洙根)을 향사하는 신계서원(新溪書院), 울진장씨(蔚珍張氏) 시조인 매계(梅溪) 장말익(張末翼)과 그의 8세손인 판서(判書) 장양수(張良洙)를 모시는 월계서원(月溪書院),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을 모신 명계서원(明溪書院) 등이 건립되었다. 또한 노동서원(魯東書院), 운암서원(雲巖書院) 등이 건립되어 울진 전역에 유학이 강론되고 예학(禮學)이 흥성하여 교육에 의한 사회 질서 확립이 어느 지역보다 강하게 실현되었다.

유학 교육의 기본은 『소학(小學)』과 『주자가례(朱子家禮)』, 향약(鄕約)과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 등이었으며, 이와 함께 선현 향사(享祀)를 병행하였다. 1868년 서원 철폐령 때는 앞서의 모든 서원들이 철폐되었고, 후일 복원되거나 향사만이라도 모시는 것으로 오늘까지 계승되고 있다.

[울진 유학의 발흥]

울진 유학의 발흥기에 활약한 대표자로는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1435~1493], 해운당(海雲堂) 남계명(南季明)을 꼽을 수 있다. 김시습매월당(梅月堂)이라는 호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김시습은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불교에 기탁하여 기이한 행적을 많이 남긴 인물이었으나, 유학으로 학문이 숙성되었고 불가에 기탁한 후에도 학문의 뿌리는 유학에 두고 있었다.

김시습과 울진의 인연은 어머니가 울진 선사장씨(仙槎張氏)였기 때문이다. 3세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을 배웠고, 5세에 시를 지은 신동이었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 부근에 있는 어머니 묘소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상을 치를 때 외숙모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시습은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날린 인물이므로 울진 지역의 문풍을 일으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남계명은 중랑장(中郞將) 남영번(南永蕃)의 손자이다. 25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이천교수(伊川敎授) 재직 시에 학조(學祖)라는 요승의 횡포를 상소하였을 때 성종은 "한유천재후 유일남계명(韓愈千載後 有一南季明)", 즉 "당나라 한유가 죽은 천 년 후에 남계명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는 비답을 내렸다. 김시습이나 남계명의 활약을 미루어 보면 당시 울진의 문풍은 소수 특정의 학자들이 초일적인 문장으로 시대를 선도하는 사조였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의례나 동규(洞規)로 윤리를 계도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울진 유학의 전개]

1. 남사고와 그의 학맥

남사고는 1509년 근남면 수곡리 누금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학자로서 역학(易學), 참위(讖緯), 감여(堪輿), 천문(天文), 관상(觀相), 복서(卜筮) 등 모든 분야에 두루 능통하였다. 남사고는 울진현령의 추천으로 사직단참봉(社稷壇參奉), 관상감천문교수(觀象監天文敎授)를 역임하였다. 남사고는 많은 예언과 기미를 말함으로써 해동의 소강절(邵康節)이라 평가되기도 하였다.

남사고는 이인(異人)으로부터 진결(眞訣)을 전수받아 선조 때의 동서분당과 임진왜란 등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는 왜장 평수길(平秀吉)이 정탐하러 오자 혼내어 보냈다는 설화도 전한다. 그의 편저로 『선택기요(選擇紀要)』와 그의 예언서로 전하는 『격암유록(格菴遺錄)』이 있는데, 자손들에 의하여 보관되다가 일부는 해방 후에 연활자본으로 간행되었고 일부는 필사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남사고의 예언가적인 도술은 당시 불안해하는 울진인들의 동요를 막는 데 공헌한 것으로 보인다. 남사고의 예언은 울진의 지역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잦은 왜구의 출현과 바다를 끼고 있는 길흉(吉凶)과 득실(得失)로부터 위안을 얻고자 하는 울진인들의 염원이 남사고의 예언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울진을 중국 장건(張騫)의 건설에 나타나는 선사(仙槎)로 명명하여 부른 것에서도 선계(仙界)를 동경하는 이상 심리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남사고의 근간은 본성을 닦아 인성(人性)을 바르게 세우도록 가르치는 유학에 있었다. 그 일례로 남사고가 평생 동안 손에 놓지 않았던 책이 『소학』이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소학』의 실천 윤리를 무엇보다 중요시했다는 것은 그의 도술이 황당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남사고의 제자로는 충효당(忠孝堂) 주경안(朱景顔),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1601~1673] 등이 있다. 주경안은 임진왜란 때 축천대(祝天臺)를 쌓고 창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전란을 거두어 주기를 하늘에 빌었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육년상을 하루같이 시묘하였고, 왕비와 선조가 붕어하자 삼년 상복을 입어 『삼강록(三綱錄)』에까지 올랐다.

임유후는 1626년(인조 4)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27년 정묘호란 때 가주서로 척화를 주장하였다. 반란을 음모한 아우 임지후와 숙부 임취정 등이 죽음을 당하자, 울진에 내려가 20여 년간 향교를 중심으로 하여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후일 문장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장령·담양부사·예조참의·경기감사·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은퇴 후에는 울진에서 향촌의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그가 만든 수친계(壽親契)는 오늘날 위친계(爲親契)의 효시가 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기휴재(棄休齎) 주필혁(朱必赫)[1636~1709], 서파(西波) 오도일(吳道一)[1645~1703] 등을 꼽을 수 있다. 오도일은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문장으로 이름나 동인 삼학사로 불렸다. 남사고에서 흘러온 학맥이 임유후·오도일에 이르러 확고한 기반이 세워짐으로써 중앙과의 학문 교류에 획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학파로는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계열로는 서인 계열이었다. 조선 말기에는 무실재(務實齋) 남진영(南軫永)[1889~1972]이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수업함으로써 조선 최후의 순유학(純儒學)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 자존을 회복하는 일에 노력하였다.

2. 윤시형윤사진

우암(憂菴) 윤시형(尹時衡)[1602~1663]은 문장과 덕행으로 명망이 높았다. 윤시형은 8년간의 삼남 지역 가뭄에 대한 상소를 올렸는데, 임금이 그의 경세관을 높이 평가하여 상소문을 출판, 전국의 수령에게 보내어 읽도록 하였다. 예학과 절의로 이름이 높았던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과 역학·성리학에 밝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등과 도의지교를 가지면서 남인 계열의 학자들과도 폭넓게 교류하였다.

황림(篁林) 윤사진(尹思進)[1713~1792]은 윤시형의 증손으로 가학을 전승하여 평생을 학문에 정진하며 향촌을 계몽하는 일에 기여하였다. 윤사진「정관치설(井觀癡說)」, 「통서연의(通書衍義)」, 「용학집해(庸學輯解)」, 「하락도설(河洛圖說)」 등을 저술하였다. 1791년(정조 15) 강원감사 윤사국(尹思國)이 그의 행적과 저서를 조정에 보고하여 영동교양관(嶺東敎養官)에 임명하고 교서관에서 간행할 것을 명하였으나, 노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윤사진은 계파나 학맥에 구애받지 않고 폭넓게 학문을 논한 인물이었다.

3. 황여일황중윤

해월헌(海月軒) 황여일(黃汝一)[1556~1622]은 1576년(선조 9)은 진사가 되고 10년 후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장악원정·예천군수·동래진병마첨절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제자로 김성일에게 『근사록(近思錄)』 강의를 들었으며 『퇴계집(退溪集)』의 교정에 참여하였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에게 영향받기도 하였다.

황여일은 문장뿐 아니라 시에도 능하여 임제(林悌)·차천로(車天輅)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며 김성일·양사언·임제 등과 창수(唱酬)한 시들이 많다. 명나라에 서장관(書狀官)으로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바로 잡는 일에 공헌하였다. 그 시대에 명나라를 다녀온, 소위 중국 문물을 견문한 인물로 향촌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였을 것이다. 명나라를 오가며 적은 일기 『은사일록(銀槎日錄)』이 있다.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1577~?]은 황여일의 아들로서 1612년(광해군 4)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헌납·낭청·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명나라에 주문사(奏聞使)로 다녀온 후에는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쳤다. 황중윤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제자로 대북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문집에 실린 그의 상소에는 정인홍(鄭仁弘)에 의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무고당한 것을 극력 변증하는 글이 남아 있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한때 기성면 황보리에 5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황여일 부자와 친교를 맺은 바 있었다. 황중윤은 정치적으로 굴절이 많았던 인물로, 향촌 사람들은 그를 주시하며 자신들의 출처(出處)를 정할 때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4. 기타 유학자들

기성면 정명리에 거주하였던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은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한때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에 부임하여 민생 구제책을 제시하여 시행토록 한 일이 있었고 진보현감으로 부임하여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산해기성면 황보리에 유배와 있을 때 황응청에게 훈계를 듣고 그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하여 「정명촌기(正明村記)」를 짓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울진 지역에 영향을 미친 학자들로 손순효(孫舜孝), 우와(愚窩) 전구원(田九畹), 죽파(竹坡) 장시성(張時聖), 만은(晩隱) 전선(田銑), 한재(寒齋) 주필대(朱必大) 등을 들 수 있다. 조선 말 유학 정신은 항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인물로 만암(晩菴) 장영시(張永時)[1872~1941]가 있다. 처사로 은둔하면서도 일제의 늑약(勒約)에 항거하였고, 피죽으로 연명하면서도 ‘두가단발불가단(頭可斷髮不可斷)’을 내세워 단발령에 대항하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