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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동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252
한자 沙銅記
영어의미역 Literary Work of Sadong Written by Yi Sanha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갑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문(記文)
작가 이산해(李山海)[1539~1609]
창작연도/발표연도 조선 중기

[정의]

조선 중기 이산해황여일을 격려하며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의 풍광과 산천을 찬양한 글.

[개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는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조카이며 이지번(李之蕃)의 아들로 대북파의 영수로 활약한 수상이다. 1592년(선조 25) 대관(臺官)의 탄핵을 받아 중도부처(中途付處)의 형을 받고 울진군 기성면 황보리에 5년간 정배되었다.

유배 생활 중 정명리에 사는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그에게 동(動)·정(靜)·득(得)·실(失)의 이치를 얻어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어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의 부친을 뵙고 관동의 청숙한 기운이 사동(沙銅)에 모여 인재를 낳은 것이 황여일의 집일 것으로 생각하여 이를 감탄하며 「사동기」를 남겼다. 「사동기」는 『아계유고(鵝溪遺稿)』 권3, 「기성록(箕城錄)」 잡저(雜著)에 실려 있는 글로서, 현재 평해황씨 해월종택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

「사동기」이산해황여일에게 사동 산천의 청숙한 기운을 변화시켜 나라의 원기가 되어야 한다고 종용하며 격려하는 내용의 글이다. 당시 황여일은 낭관(郎官)으로 있었는데, 사동산(沙銅山) 서쪽 마악(馬岳) 아래에 당(堂)을 지어 어버이를 모시고 학문에만 몰두할 꿈을 갖고 있었다. 이산해황여일의 이러한 뜻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산해황여일에게 아버지가 아직 이순(耳順)의 나이이고 황여일도 나이가 젊기 때문에 일찍부터 벼슬을 버리고 은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의의와 평가]

「사동기」황여일로 인해 울진군 기성면 사동촌의 풍광과 산천을 찬양한 글로 이산해의 유려한 문장 솜씨가 돋보이는 글이다. 이 글의 끝에 죽피옹(竹皮翁)이라고 붙인 점도 특이하다. 이산해는 5년 후 약포(藥圃) 정탁의 청원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니 그도 사동촌의 기운을 받은 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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