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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에 게배 들어왔는교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A020301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거일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승훈

2003년 11월 11일에 방영된 인기드라마 대장금에서 울진대게에 관한 부분이 나와 화제가 되었다.

최상궁: 송이와 검은 해삼, 전복은 어찌 됐느냐?

금영: 이미 손질을 다 해둔 상태입니다. 헌데 상어지느러미가 없습니다.

최상군: 괜찮다. 대신에 울진에서 올라온 대게를 찢어 상어지느러미탕처럼 만들 것이다.

금영: 대게로요?

최상궁: 그래! 울진대게의 맛은 임금님도 경탄해 마지않으신 것이다. 더구나 처음 먹어보는 것이니 정사께서 크게 만족하실 것이다!

금영: 예 마마님. 그럴 것입니다.

울진을 대표하는 상품인 울진대게는 오랜 시간 영덕대게란 이름에 가려 그 이름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으나 드라마 대장금을 통해 엄청난 홍보 효과로 현재 어느 정도 그 명성을 찾고 있다. 그러나 이는 대장금을 통해 울진의 대게가 어느 정도 알려졌을 뿐으로 울진대게에 대한 역사적 기원 등의 홍보에서는 미비하였다.

역사문헌에서 울진대게를 찾아보면 1530년(중종 25년)에 발행된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의 제 45권에는 울진현과 평해군의 건치연혁, 관원, 군명, 성씨, 풍속 산천, 성곽, 봉수, 누정, 향교, 역원 등이 상세히 나와 있고, 특산물로는 자해(紫蟹) 즉, 대게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1799년(정조 3년) 실학자인 풍석 서유구가 농촌경제와 관련하여 지은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예규지편’에서 대게(紫蟹)는 울진현과 평해군의 주요 토산물로 기록돼 있다.고산자 김정호가 1866년(고종 4년)에 완성한 한국지리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울진조’와 ‘평해조’에 대게(紫蟹)를 주요 토산물로 적시하고 있다. 또한 1561년(명종 l6) 문과에 급제하여 1590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양사(兩司)로부터 임진왜란에 대한 책임탄핵을 받아 울진(평해군)으로 3년 동안 유배를 간 아계 이산해는 『아계유고(鵝溪遺稿)』라는 문집을 남겼다. 그런데 이 『아계유고』의 제3편 해빈단호기에 기성 근처의 바닷가 지명을 나열하고 있는데 지금의 평해읍 거일리를 해진(蟹津)이라 칭하고 있다. 지금의 거일리는 조선시대의 해진(蟹津), 즉 ‘대게의 나루’라는 의미로 대게의 원조가 평해읍 기성리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또한 『아계유고(鵝溪遺稿)』 제4편에는 해포(蟹浦)[게의 포구]라는 제목의 이산해의 시가 있다. 즉 ‘해진’, ‘해포’라는 지명의 명칭에서 울진군 평해읍 거일리가 대게의 원조마을이란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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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원산지마을 표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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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대게 유래비

쌀이 부족해 쌀밥은 먹지 못했지만 대게로 배를 채웠을 만큼 대게잡이가 활발하던 시절이 거일2리에 있었다. 과거 거일2리에서 잡아온 대게는 당시 후포에 있던 동림수산으로 팔렸다. 동림수산은 대게로 통조림을 만들어 일본 등지에 수출을 하던 곳이었다. 당시에는 활어에 대한 생각도 없었으며 잡아온 대게의 대부분은 동림수산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대게의 가치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지난 후 울진 지역으로 도로가 생기면서 대게를 팔 수 있는 판로가 개척이 되었다. 그러면서 대게의 유통이 가능해졌고 더욱 좋은 가격으로 대게를 팔 수 있게 되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마을 주민들은 그때 주변의 마을에서 “거일에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라고 표현할 만큼 대게를 통한 수입이 좋았다. 특히 그 당시 후포항은 거일에서 다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수입이 높았으며 각 가구별 소득도 높았다. 대게가 많이 잡히는 기간에는 선원 1인이 하루 조업을 나가서 100마리의 대게를 수협에 위판을 할 정도로 많은 양의 대게가 잡혀 어가소득이 다른 지역의 어촌보다 월등히 높았다. 과거 거일리에 대게가 많이 잡히고 유통이 되었던 사실을 오늘날 알리기 위하여 2003년에는 울진대게 유래비를 조성해서 세웠고, 또 울진대게 공원을 조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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