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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 앞바다에서 한국전쟁을 경험하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A030202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거일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승훈

8·15해방을 맞은 것은 방명록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당시에 다니던 학교는 평해에 있던 학교로 일본인 학교였다고 한다. 광복이 된 후 후포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광복 당시 워낙 어린 시절이라 정확한 기억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광복이 되기 전 초등학교를 다닐 때의 기억중 하나는 항상 공습에 대비한 훈련을 학교에서 실시했다는 것이다. 방명록이 기억하기에도 당시에 연합군의 비행기가 해상에 나타나 폭격을 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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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 어르신 학생시절

이후 중학교 다니는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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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 어르신 학생시절

한국전쟁 당시 평해 방향을 인민군이 점령하자 집안 식구들 모두 급하게 피난길을 오르게 되었다. 상황이 너무 급하여 가족들이 서로 떨어져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방명록은 어머니, 누나, 둘째 형수와 함께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거일리의 주변은 낮은 구릉으로 둘러 쌓여 있어 산을 넘어서 피난을 가는 것은 힘들었다. 이에 후포에 있던 동림회사의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피난을 떠나게 되었는데, 평해를 점령한 북한군들은 산 위에서 사격을 가하기도 하여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이 부산 영도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이다. 일주일간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 후 간신히 다른 가족들의 소식을 들어 함께 만나게 되었는데, 그렇지 못했다면 아마 이산가족이 되어 생사를 알 길이 없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지금도 쓸려온다고 한다. 얼마나 부산에서 거주했는지 알 수 없지만 곧 지나지 않아 고향 거일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와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그치지 않았다. 연합군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거일리의 앞 바다에도 연합군의 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연합군들은 먼 바다에 대기하고 북한군들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거일 앞바다에 있는 배를 북한군의 보급선으로 간주한 연합군의 전함은 함포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 배는 보급선이 아닌 거일 앞바다에 있는 마을배였으며, 당시 배 안에 타고 있던 방명록의 형님은 용케 함포사격이 빗나가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함포사격으로 당시 해안에 매어둔 소 5마리가 죽었고, 죽은 소들은 뒤이어 마을을 점령한 북한군들이 가지고 갔다. 연합군과 북한군의 포격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과정을 반복되다가 북한군이 완전히 물러간 때는 1952년 음력 8월 15일 경이었다. 당시 당숙과 함께 성묘를 하러 가는 과정에서 학도병들이 북으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고, 마을로 돌아오자 북한군들이 모두 떠나고 없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 북한군이 이제 북으로 돌아갔음을 느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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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과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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