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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일품 주막거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E010102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
집필자 신상구

두천2리 바깥말래는 골마와 주막거리, 숲거리 세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현재는 이 중 골마가 가장 큰 마을이지만, 과거에는 주막거리로 더 이름이 난 마을이기도 하다. 십이령 고개길의 세 번째 길목에 자리 잡고 바릿재를 넘어 이곳에서 한숨을 돌리며 쉬어가는 곳이 바로 두천2리주막거리이다. 과거 이곳에 두천원(斗川院)이 있었고 원의 기능이 쇠하면서 주막이 생겨나고 여러 주막들이 함께 생성되면서 마을이 된 곳이다.

주막거리의 주막들은 기존 민가들이 주막으로 변형된 것이다. 기억에 의하면 약 15채 정도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주막거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중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한 채가 2002년까지 잘 남아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며 만든 건물배치도에 따르면 선질꾼들이 다니는 길을 중심으로 봉화 방면 오른쪽에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가장 안쪽에 있는 장이출 주막집은 이곳을 왕래하던 사람들이 말을 메어 두는 장소였다고 한다. 이 집은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철거작업에서 가장 오랫동안 남겨져 1985년에 철거되었다.

입구에 위치한 최완석 주막집 두 채는 당시 주막거리에서 가장 먼저 주막을 한 곳으로 그 규모면에서도 주변 다른 주막보다 월등히 크다. 선질꾼 20여명이 숙박할 수 있는 큰 봉놋방이 2채 있었으며, 두천 주막거리 중 유일하게 허가를 받고 영업한 집이다. 1941년 이곳으로 시집온 최완석의 며느리 박금년 할머니에 의하면 주변 다른 집은 주막이 없었는데 이윽고 다른 사람들이 주변으로 조그만 담배가게를 하면서 주막을 겸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허가를 받아서 하는 최완석 주막집에 눈치를 보면서 조그만 물품을 파는 가게를 하던 집들이 오는 선질꾼들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자 점차적으로 숙박을 할 수 있도록 겸하게 되고, 이것이 주변으로 확대되면서 주변으로 10채 이상되는 가옥들이 표면적으로 주막을 할 수 있도록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집을 제외한 다른 곳은 눈치를 보며 장사를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최완석 주막집에서 수용하지 못하는 나머지 인원들을 서로 나누어서 유숙시켜야만 했다.

선질꾼들이 이곳을 가장 많이 찾은 때는 50~60년대로 보인다. 18세기 이후 상품 유통의 발전에 따라 육상교통이 발전하면서 장시가 점차적으로 증가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각 마을은 상호 부족한 물품에 대한 교류가 일어난다. 울진의 바닷가에서는 미역과 소금이 생산되었고 일찍이 임금님의 진상품이었던 울진의 화포는 상품으로서 가치가 뛰어났기 때문에 이를 팔고 이득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 길을 다니던 선질꾼들의 물품이 바로 이것이다. 당시를 기억하는 마을 사람들은 50년대 중반 주막거리는 늘 선질꾼들의 소리를 들썩였으며, 그들이 소비하는 술을 만들기 위해서 마을에는 술도가(양조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먼 길을 가는 사람이며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다 보니 술맛에 대해서는 남다른 입맛을 가졌는지, 당시 이곳 두천 주막거리의 막걸리는 울진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인기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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