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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도부꾼으로 딸 일곱을 키우다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E020203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
집필자 신상구

막연한 생계에서 시작된 도부꾼을 17년 동안 지속하였으며, 그리고 딸 일곱을 키워냈다. 밑천이 없어 어렵게 시작한 장사는 점점 규모가 커지고 돈벌이도 괜찮아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하였고 욕심도 커져갔다.

해산물을 가득 실은 보따리 하나 정도는 그 크기가 점점 커져 오징어를 두 가마니씩 장날에 맞추어 화물로 보내고 미역도 한 동이씩 옮겨가고 꽁치는 한 광주리씩 싣고 가는 등 규모가 날로 커져갔다. 지역도 춘양장이 아닌 봉화장, 봉성장, 제성장, 명호장까지 확대되었으며, 장을 다니면서 팔던 물건이 남으면 다시 마을을 찾아 가정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팔았다. 그렇게 춘양에서 넘어오는 울진의 골골 솔평지, 소천, 서벽 골짜기 등 두 발로 안 다닌 곳이 없었다. 아침을 굶고 이른 새벽부터 골골을 다니면 가끔 그 눈에서 허깨비가 나올 정도로 힘들지만 멈출 수 없었던 17년의 도부꾼 생활이었다.

17년 동안 어느 정도 돈도 벌어 딸 아이 7명을 공부시키고 시집도 보냈다. 16살 연상의 남편이 일찍 간 것에 대한 설움 그리고 가정에 소홀한 그를 그리며 평생 재혼도 하지 않았다. 아들을 낳지 못한 아쉬움을 딸을 잘 키우는 것으로 만족하였으며, 그렇게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나갔다.

선질꾼들의 길을 자신이 가게 될 것을 알았는지 그녀는 자신의 마을을 지나다니던 선질꾼을 기억하고 있다. 바짓가랭이의 중간을 질끈 동여 묶고 쉴 때도 지게를 떠받치고 허리춤만 뒤로 눕혀서 바닥에 엉덩이가 붙지 않게 작대기를 밑에 받치고 쉬는 선질꾼들을 그녀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선질꾼을 마주치면 이밥(쌀밥)을 얻어 먹을 수 있어 좋았다고 하는 그녀가 기억하는 선질꾼은 하루에도 적게는 5~6명이 짝을 이루고 많게는 십여명씩 짝을 이루어 등짐을 지고 지나가는 고단한 삶의 지탱하는 사람들이었다. 등짐에 올린 지게에는 바다에서 나는 소금과 파래, 미역과 같은 해산물이나 손으로 만든 조리, 소쿠리 등을 얹고 나머지 한쪽 지겟가지에는 밥해먹는 솥단지 같은 것을 걸어 두는 선질꾼들이 쉴 때 부르는 노래를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헌신짝도 짝이 있고

고리짝도 짝이 있고

농짝도 짝이 있는데

체이짝(체) 같은 내 팔자야

암반(국수판)같은 내 팔자야

홍두깨비(홍두깨)같은 내 팔자야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르니 ‘맞다 그 사람들은 그 팔자가 다인갑다’라는 어머니의 말이 생각난다고 한다. 생각했을까. 그녀가 이 사나운 팔자길을 가게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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