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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주막을 비우고 피난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E030102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
집필자 신상구

시집와서 26살이 되던 해 한국전쟁이 났다. 그해 동짓날 그믐에 작은 아들을 낳았다. 지방 빨갱이(인민군을 대신하여 마을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들이 박금년의 집에 순경들이 머물렀다는 이유로 추궁하자 마을 아래로 피난을 갔다. 당시 큰 아들이 다섯 살이었다. 멀리 가면 힘들다는 생각에 여차하면 마을에서 살고 싶었지만 주막을 하던 집들은 모두 다 나쁜 일을 당하였다. 다음 순서로 그녀의 집이라고 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부랴부랴 도망을 나왔다. 밑으로 내려와서 친척집에서 한국전쟁을 보냈고 다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문을 꼭꼭 잠그고 밤에 잠을 청하는데 누군가가 집으로 왔다. 마루에 죽 앉아 있는 모습이 혹 지방빨갱이들로 착각하여 숨을 죽이면서 숨어 있었다. 가만히 내다보니 순경(경찰관)임을 확인하고 밖으로 뛰어나가 ‘아이고 살았네’라고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주막을 하면서 이리저리 많은 일을 겪고 많은 사람들을 재우고 먹이다 보니 지역에서는 돈을 많이 번 사람으로 소문이 났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것이 안 좋은 시각으로 비춰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주가 없는 산골생활에서는 주막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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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피난갔던 박금년 이야기

한국전쟁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주막은 계속 이어나갔다. 큰 아들이 어느새 장성하여 사우디아라비아로 돈을 벌러 간 1960년대에도 그녀의 주막은 계속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던 해 오랜만에 주막을 비우고 큰 아들이 외국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충청남도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곳에서 결혼해서 생활하는 딸 식구들과 함께 비행기를 구경 가던 중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접하였다. 아들을 만나는 기쁨도 잠시 대통령의 죽음에 놀란 박금년은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삶은 지속되어 돌아와서도 주막은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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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년 인터뷰 7

과거보다 손님의 수는 현격히 줄어들었다. 선질꾼들의 자리는 1970년대 도부꾼들이 가끔 채웠지만 그네들은 잠을 자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손님은 어쩌다 지나갈 만큼 뜸해지면서, 주막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이곳에 공사 또는 전근을 온 학교 선생들이 머무는 하숙집이 되었다. 그렇게 주막을 스쳐가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세월을 보냈고, 지금도 울진읍을 찾아가면 그녀를 알아보고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50년 평생 주막생활을 통해서 그녀는 선질꾼부터 시작하여 도부꾼 그리고 막 산골로 전근을 온 사람들에게 때로는 누나가 되고 친구가 되고 또는 가족이 되면서 함께 주막을 지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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