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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308
한자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영어의미역 Monument in Changnyeong Commemorating the Border Inspection by King Jinheung)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심현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건립시기/일시 561년 2월 1일연표보기
관련인물 진흥왕
재질 화강암
높이 300㎝
너비 175.5㎝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문화재 지정번호 국보 제33호
문화재 지정일 1962년 12월 20일연표보기

[정의]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 있는 삼국시대 울진 지역의 지명과 역사적 상황을 보여주는 비.

[개설]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는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세운 기념비로, 북한산(北漢山)·황초령(黃草領)·마운령(摩雲嶺)에 있는 비와는 달리 비문 서두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표현이 보이지 않아 그 성격을 규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를 척경비(拓境碑) 또는 순수비(巡狩碑), 군신회경비(君臣會慶碑), 군신회맹비(君臣會盟碑), 전군지휘관회의(全軍指揮官會議)의 성격을 지니는 비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명문에서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열거된 것으로 보아 순수비(巡狩碑)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공식명칭은 창녕진흥왕척경비이다.

비문의 전반부는 대체로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나, 첫머리의 신사년(辛巳年)이라는 글자를 통하여 561년(진흥왕 22)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어, 앞의 3기의 순수비보다 수년 앞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후반부는 명확하게 판독되는데,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을 중앙행정관·지방군정관(地方軍政官)·지방행정관·시종(侍從)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당시 지방행정조직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건립경위]

진흥왕대는 신라가 종전의 미약했던 국가체제를 벗어나 영역 확장을 도모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이다. 6세기 진흥왕은 재위 37년 동안 정복적 팽창을 단행하여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을 완전히 병합하였고, 한강 하류 유역으로 진출하여 서해안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동북으로는 함경남도 이원 지방까지 이르렀다.

진흥왕은 확대된 영역을 직접 순수하면서 이를 기념하려고 이른바 순수비를 세웠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와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 등 모두 4개로 이중 마운령비와 황초령비는 북한에 있다.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는 신라가 비화가야(非火加耶)[지금의 창녕]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직접 순수(巡狩)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건립 연대는 비문에 보이는 “신사년이월일일립(辛巳年二月一日立)”으로 미루어 561년(진흥왕 22) 2월 1일로 추정된다. 창녕은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 데 중요한 길목으로 본래 비화가야가 자리한 곳이었으나, 진흥왕대에 신라의 영역이 되어 비자화군(比自火郡)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전승 기념비는 정복 집단의 신통한 능력과 정복 사업의 위업을 자랑하고 정복지의 백성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고 선전함으로써 피정복민을 회유하는 고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선전의 역할도 하였다.

[위치]

본래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는 창녕읍 동쪽에 우뚝 솟은 화왕산(火旺山)에서 뻗어 내린 목마산(牧馬山) 서쪽 언덕에 있었는데, 1914년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라는 일본인에 의해 발견되었고, 1924년에 지금의 자리인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형태]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편평한 거석(巨石)의 표면을 약간 갈았다. 비는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받침돌이나 지붕돌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시대 비석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높이는 가장 높은 부분이 약 300㎝이고, 가장 낮은 부분이 115.1㎝이다. 폭은 가장 넓은 부분이 175.7㎝이고, 두께는 30.3㎝에서 51.5㎝이다. 직선으로 글자를 둘러싸는 선을 그었으나 정연하지 않다. 비면은 자연석 그대로이나 글자가 새겨진 면은 사방을 파고 약간 갈았다.

[금석문]

비문의 서체는 예서와 해서의 중간으로 광개토대왕비의 글씨체와 흡사하며, 행마다 18~27자씩 모두 27행 643자이다. 이 중에서 현재 400자 정도가 판독된다.

[현황]

울진 지역의 옛날 명칭이 『삼국사기』[1145]를 비롯하여 『고려사』[1451]·『세종실록지리지』[1432]·『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우진야(于珍也)로 나온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지명이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561]에서 보인다. 특히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에서 당시의 영역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곳에 나오는 “우추실지하서아군(于抽悉支河西阿郡)”의 명문 중에 우추[지금의 울진]와 실지[지금의 삼척], 하서아[지금의 강릉]가 지역적으로 서로 그 위치가 붙어 있으므로 이 세 지역을 하나로 통합된 군으로 보는 견해와 각각 별개의 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울진봉평신라비[524]에서 실지군주가 거벌모라도사와 실지도사를 통할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거벌모라[지금의 울진]와 실지[지금의 삼척]는 별개의 영역인 행정 성촌으로 분리되어 있으면서 실지군주의 담당 하에 있다가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에서 보이듯이 늦어도 진흥왕대인 540년에서 561년 사이에 각각 군(郡)으로 개편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3개의 군을 통합된 하나의 군으로 보기보다는 각각의 군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

이러한 우추·우진야 지명은 음운 상에서 3세기 중엽경의 기록을 전하는『삼국지』에 보이는 진한 12국 중의 하나인 우중국(優中國)과 서로 통하며, 『삼국유사』에서 울진 지역을 울진국(蔚珍國) 또는 울진대국(蔚珍大國)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울진 지역에 국(國)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의의와 평가]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진흥왕이 어려서부터 즉위하였다는 사실이 나오고, 신라의 강역뿐만 아니라 신료(臣僚)의 명단과 소속부명·관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특히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는 울진과 관련하여 당시 울진의 지명과 역사적 상황을 보여주는 귀중한 금석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