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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383
한자 蔚珍鳳坪新羅碑
영어의미역 Silla Monument in Bongpyeong of Ulji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심현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건립시기/일시 524년연표보기
관련인물 법흥왕
재질 화강암
높이 204㎝
너비 상폭 34㎝|중폭 36㎝|하폭 54.5㎝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91 지도보기
소유자 국유
문화재 지정번호 국보 제242호
문화재 지정일 1988년 11월 4일연표보기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율령비.

[개설]

울진봉평신라비는 대구에서 발행되는 일간지인 매일신문에 1988년 4월 15일자로 특종으로 보도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발견 당시 울진봉평신라비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 118번지 주두원씨 소유의 논에 밑 부분의 극히 일부만을 바깥으로 드러낸 채 거꾸로 박혀 있는 상태였다. 논의 주인은 평소 농사를 짓는데 적지 않게 지장을 받고 있었으므로 때마침 같은 해 1월 20일 인근에서 객토작업을 진행하던 굴착기를 불러 돌 자체를 들어내고서 논 밖의 길가에다가 버렸다. 표면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으므로 글자가 새겨진 비인지 어떤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 뒤 몇 개월이 지나는 사이에 봄비가 내려 자연히 돌에 묻은 흙이 씻겨내려 가자 글자의 일부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돌 곁을 매일 지나다니던 마을 이장 권대선이 1988년 3월 20일 글자가 새겨진 사실을 우연히 확인하여 바로 다음 날 죽변면사무소와 울진군에 신고하였다. 울진군 공보실 직원들이 즉시 현장에 파견되었으나 내용을 잘 알 수가 없어 일단 그대로 놓아두었다.

1988년 3월 26일에는 울진군의 관광문화재계장 이규상이 다시 현장에 출장하여 알 만한 몇몇 글자를 대충 읽고서는 그것이 예사롭지 않은 고비임을 짐작하여 3월 29일 경북도청에 들러 구두로 신고하였다. 글자를 세로 줄로 읽어야 함에도 가로로 잘못 읽어 조선시대의 비로 간주하는 등 약간의 촌극도 벌어졌다. 4월 7일에는 향토사가 윤현수가 울진군청의 도움을 받아 비를 처음으로 탁본하였다. 울진군청은 이때 파악된 내용을 토대로 경상북도에 서면으로 정식 보고하였다.

그와 같은 정보를 입수한 대구 매일신문의 문화부기자 박진용은 곧장 현장으로 달려가 비의 출현 사실을 독점 취재하여 4월 15일자로 특종 보도하였다. 당시 신문의 1면 거의 전부를 울진봉평신라비 관련 기사로 메울 정도로 크게 다루었다. 신문사에서는 비밀이 자칫 새어나갈까 염려하여 미리 기사를 작성하여 편집부에 넘기고 나서 전문연구자들에게 알렸다. 전문가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 비문을 멋대로 판독하고 내용을 해석한 탓에 처음 보도된 기사에는 잘못되거나 부정확한 면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수정 보완하여 다시 보도할 필요성이 제기되자 비로소 대구 시내 대학에 근무하는 교수들에게 비의 출현 사실을 통보해서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울진봉평신라비가 발견되기 꼭 1년 전인 1987년 대구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고대사연구회라는 학회에 소속한 연구자들이 여러 사람 연락을 받고 1988년 4월 16일 비문을 조사하고자 갔다. 현장에서 비문을 정식으로 탁본도 하고 글자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전체적인 내용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날 매일신문을 통하여 재차 보도되었다. 그 뒤 각종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전국적으로 비의 출현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굴착기로 비를 들어내는 작업 과정에서 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으나, 1988년 5월 5일 한국고대사연구회 주최로 비문을 다시 정밀 판독할 때에 참관한 대구대학교 학생에 의하여 비편이 발견되어 완형을 갖추게 되었다.

울진봉평신라비가 발견된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조사가 계속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5월 5일에 떨어져 나간 비편이 발견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정식으로 비가 출토된 위치를 확인하는 발굴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비좌(碑座)가 확인되지 않아 비가 원래 위치하였던 정확한 장소를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이동한 사실만을 확인하였을 따름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1988년 8월에 비의 모형을 만들어 활용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정밀한 판독과 분석을 통하여 울진봉평신라비가 삼국시대 신라의 비로 525년 세워진 것으로서 당시 신라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임이 드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는 상당 부분 다르거나 아니면 전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국보급의 문화재임이 틀림없다고 판단되어 지정 절차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를 위해서는 먼저 정식 학술회의를 열어 비문의 내용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먼저 한국고대사연구회[현재의 한국고대사학회] 주관 아래 학술회의를 갖기로 하였다. 그 결과 1988년 7월 22일에서 23일 이틀간에 걸쳐 대구의 계명대학교에서 비문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첫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학술회의는 대우재단과 유진기념관의 도움을 받아서 진행되었으며 수백 명의 연구자가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학술회의의 결과는 한국고대사연구회가 발행하는 기관지인 『한국고대사연구』 2호를 특집호로 꾸며 1989년 5월 간행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학술회의를 열면서 비의 명칭을 잠정적으로 울진봉평신라비라 부르기로 하였다. 그 뒤 학술회의를 거치면서 많은 논란이 뒤따랐지만 처음 명칭 그대로를 사용하기로 결론이 내려졌고 마침내 국보 242호로 지정되었다.

[건립경위]

524년(법흥왕 11) 울진 지역에서 신라에 대한 모종의 반란 사태가 발생하여 경주와 삼척의 대군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책임자에게 장 60대와 100대를 치고 얼룩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이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을 적어 석비를 세웠다.

[위치]

2008년 8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번지에 있는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 안에 옮겨 전시되고 있다. 전시관은 기존 비각의 바로 앞에 지어졌으며, 울진읍에서 국도 7호선을 타고 북쪽으로 가다가 죽변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300m를 가면 우측에 동남쪽으로 봉평해수욕장 인근에 있다.

[형태]

울진봉평신라비의 크기는 높이가 204㎝, 글자가 새겨진 부분 위쪽 너비는 32㎝, 가운데 너비 36㎝, 아래쪽 너비 54.5㎝로 전체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부정형으로 414년(장수왕 2)에 세운 광개토대왕비와 유사하며, 자연석을 거의 그대로 이용한 것은 삼국시대에 제작된 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금석문]

울진봉평신라비가 건립된 연대는 첫머리의 간지인 갑진년(甲辰年)과 함께 모즉지매금왕, 사부지갈문왕 등의 인명으로 미루어 신라 법흥왕(法興王) 11년인 524년이 확실하다. 당시까지 알려진 신라의 비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울진봉평신라비 비문은 자연석 화강암에 한 면[앞면]만을 다듬어 글자를 새겼는데, 구성은 전체 10행으로 1행 31자, 2행 42자, 3행 41자, 4행 42자, 5행 25자, 6행 46자, 7행 45자, 8행 44자, 9행 40자, 10행 42자로 전체 글자 수는 398자이다.

전체 10행으로 이루어졌으며 글자 사이의 간격도 일정하지가 않으며, 각 행의 글자의 수는 같지가 않다. 가장 많은 행은 제6행으로 46자에 달하며, 적은 곳은 25자의 5행으로 전체 글자 수는 398자이다. 공교롭게도 이 수치는 비문의 마지막의 “삼백구십팔(三百九十八)”이라는 명문과 일치한다. 서체는 당시의 일반적인 양상과 비슷하게 예서에서 해서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것으로서 읽기 어려운 글자는 별로 많지가 않다. 다만, 마모가 약간 진행되거나 이체자(異體字)를 사용한 몇몇 글자는 뚜렷하게 확인하기 곤란하다. 특히 중요한 대목은 불명확한 글자가 많아 내용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524년 정월 국왕인 법흥왕과 그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을 비롯한 14인이 합의하여 어떤 중대한 사항을 결정하고 그를 집행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결정이 내려지기 바로 직전 해인 523년 비가 세워진 곳으로 추정되는 거벌모라 지역에 대군을 동원해야 할 어떤 사태가 발발하고 그를 해결하고 난 뒤 이 지역을 대상으로 책임을 물어 사후 조치를 취하고 나아가 사건에 직접 연루된 유력자를 처벌하여 그 사실을 영구히 기록하여 알림으로써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비를 세운 것이다. 비의 성격을 둘러싸고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으나, 율령과 관련되는 내용을 담은 율령비로 보고 있다.

국왕을 비롯한 여러 신하가 합의하여 중요한 결정을 한 점, 국왕도 부명을 칭하고 있는 점, 노인법이란 율령의 편목을 시행하고 있는 점을 비롯하여 신라육부, 장형의 존재 등은 신라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주요한 요소들이다. 이를 매개로 그동안 논란되어 온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나아가 5~6세기 신라사의 내용을 한층 풍부하게 서술할 수 있게 된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의의와 평가]

울진봉평신라비가 발견됨으로 인하여 고대사 연구가 활성화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즉, ‘신라육부(新羅六部)’라는 글자가 나오므로 인해 6세기 초 이전에 이미 신라에 6부가 성립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법흥왕이 탁부(啄部)로, 그 동생인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은 사탁부(沙啄部) 소속으로 되어 있어서 형제가 각기 다른 부(部)를 관칭(冠稱)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또한 노인법과 죄인을 처벌하는 장형의 존재는 520년(법흥왕 7)에 율령 제도가 성문법으로서 실제로 행하여졌음을 증명해 주는 등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었다. 이 밖에도 부를 초월하지 못한 왕권의 한계, 당시 신라의 영역, 관료 제도, 지방 통치 조직과 촌락 구조, 의식 행사 양상 등의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