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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670
한자 獨立運動家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Fighter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전인식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으로 독립을 위해 투쟁한 활동가들.

[개설]

울진에서의 독립운동가는 크게 3·1운동, 청년운동, 신간회, 울진공작당, 창유계의 활동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식민지가 시작된 후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민족해방운동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것은 기존의 조선이 아닌 새로운 근대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는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목표가 더욱 뚜렷해졌다.

하지만 운동을 주장했던 사람들의 사회 경제적 지향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했던 사회주의 계열로 나누어져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어느 한쪽만의 독립운동이 옳다고는 할 수 없으며 모두가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해 희생하여 독립운동을 한 것은 높이 살만한 일이다.

[3·1운동가]

일제강점기 초반인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통치 시기로 행정, 사법, 입법, 군사통수권 등 모든 권한이 일본 총독에게 있었다. 그로 인해 행정 관리와 헌병 경찰을 동원하여 조선 민족을 억압하고 폭압적인 정치를 일삼았고 군사력으로 의병을 탄압하고 계몽운동도 탄압하였다. 경제적인 수탈도 자행하였고, 토지조사사업은 농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우리 민족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울진의 3·1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늦게 일어났다.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4월에 들어서야 매화면 매화리, 북면 부구리 등 2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운동에는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던 장식(張植), 그리고 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은 윤병관(尹炳寬)과 윤호규·남광호·최중모·윤정규·최헌탁 등이 참여하여 함께 거사를 논의하였다.

그 다음날 윤병관은 고성리 주진휴(朱鎭烋)와 고목리 전병겸(田炳謙)에게 연락하여 매화 장날과 부구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일으킬 것을 논의하였다. 주진휴는 울진읍 감리교회 목사 이동식(李東湜), 전도사 황병호(黃炳鎬), 권사 최동순(崔東舜)과 만나 거사를 계획하던 중 일제 관헌으로부터 예비 검속을 당하였다.

이런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울진의 만세시위운동은 매화면 매화리에서 시작되었다. 매화리의 만세 시위는 매화리금매리 출신의 청년들과 고목리 전병겸최효대·남재량·윤정규·최중모·윤병관·윤학규·남강호·장형관·윤상홍 등이 주도하였다. 이 시위는 4월 10일부터 4월 11일 밤까지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모두 11명이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죄로 실형을 선고 받았다.

구체적으로는, 전병겸(田炳謙)[26세]·최효대(崔孝大)[21세]가 징역 5개월, 남재량(南載亮)[22세]·윤정규(尹定奎)[24세]·윤병관(尹炳寬)[28세]·최중모(崔重模)[22세]·윤학규(尹學逵)[34세]·남광호(南光鎬)[20세]가 징역 4개월, 장형관(張炯觀)[29세]·윤강규(尹康逵)[27세]가 징역 6개월, 윤상흥(尹相興)[27세]이 태형 90대 형을 받았다.

그 후 북면 부구리의 흥부(興富)장터에서도 4월 13일 오후 1시경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이 부구리 흥부장터 시위 역시 전병항(田炳恒)·남병표(南炳豹) 두 사람이 태극기를 동네사람들에게 미리 지참시키고 만세운동을 한 것이었다. 이 시위에 참여한 전병항매화장터 시위 주동자인 전병겸의 사촌이었고, 남병표 역시 매화장터에도 참여했던 사람이었다.

그 외에도 김일수(金一壽)·황종석(黃宗錫)·홍우현(洪禹鉉)·김기영(金琪榮)·김도생(金道生)·박양래(朴揚來)·김봉석(金鳳錫)·김재수(金在壽)·이상구(李相龜)·김광수(金光壽) 등도 이날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외에 전문규(田文圭) 노인과 김경선(金敬善) 노인은 젊은 층이 만세시위운동을 하는데 정신적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부구리 만세 시위로 많은 사람이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전병항(田炳恒)·남병표(南炳豹)·김일수가 각 징역 7개월, 황종석·홍우현·김기영·김도생·박양래·김봉석·김재수·이상구 등이 각 징역 4개월을 언도받았다.

그 외 이화익(李和翊)은 1919년 4월 5일 당시 울진군수 강성희(姜星熙)가 온정면 소태리에 와서 일제에 찬동하는 강연을 하고 찬동서약서를 날인받아 자전거로 평해로 가는 도중 소태리 일본헌병주재소 옆에서 찬동서약서를 반환하라고 외쳤으며, 일본 헌병에게 체포될 때에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화익은 공무집행방해 및 「보안법」 위반으로 부산형무소에서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기성면 봉산리 박경선(朴敬善)은 만주 서간도에 거주하면서 입수했던 「독립선언문」 12매를 가지고 있다가 일본 헌병에게 발각되어 「출판물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박경선은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금고 2개월의 형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울진 출신으로서 타지역의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한 경우도 많았다. 최익한(崔益翰)·최진순(崔瑨淳)·황상봉(黃尙鳳)은 서울의 만세시위운동과 관련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온정면 나부석(羅富碩)·한영육(韓永育)매화면 배희직(裵喜稷)은 영해(寧海) 시위에 참가하여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전영경(田永璟)과 황윤성(黃允成)은 각각 원산과 평양 시위에 참가하여 그곳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문재무(文在武)와 문전문(文田文) 형제는 간도 용정촌의 독립시위에 참가하였으며, 기성면 김병두(金炳斗)는 『독립신문』 배달과 자금모집으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청년운동가]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통치 정책을 바꾸었다. 헌병경찰을 보통경찰로 바꾸고, 조선인의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민의창달(民意暢達)을 내세우며 조선인의 민족적 활동을 일정하게 열어주었다.

그러나 경찰의 숫자는 월등하게 늘었고, 식민 통치에 적대적인 민중층과 양심적인 민족주의 세력은 철저하게 탄압하였으며, 그 대신 자본가와 지주층은 회유하여 식민 통치의 협조 내지는 원조 세력으로 편성하고, 직업적인 친일분자를 비롯한 광범한 친일파를 적극적으로 육성하여 식민 정책에 이용하였다. 이런 민족 분할 통치책이 바로 문화정치의 본질이었다.

문화 운동의 과정에서 특히 청년층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전국적으로 청년단체가 결성되었다. 특히 3·1운동을 거치면서 청년운동이 독자적인 이념과 조직을 갖추면서 민족독립을 담당할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전국적인 청년운동의 흐름 속에서 울진에서도 1919년 8월 울진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장식(張植)·전영직(田永稷)·이우영(李愚榮)·전영경(田永璟)·노기일(盧基一) 등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장식은 울진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갖고 온 사람으로, 청년회의 부회장이었다. 그리고 이우영이 학무부장, 장용석(張龍錫) 등이 평의원이었다. 이들은 지역 청년들에게 봉건성 극복, 근대성 수용을 위해 연극 및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22년 지역 유지들의 경제적인 지원으로 울진강습소를 설치 운영하였는데, 이 강습소는 1925년에 이르러 울진 유일의 사립 보통학교인 제동학교(濟東學校)로 확대되었다. 그 외에도 울진청년회는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 운동인 형평운동에도 관여하였다.

[사회주의운동가]

1. 신간회 울진지회

192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타협적 민족개량주의가 확산되자 사회주의자들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민족협동전선을 제기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신간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울진에서는 신간회 지회가 조직되었고, 창립준비위원에는 이우영(李愚榮)·주진복(周鎭福)·장인환(張仁煥)·김병호(金炳虎)·남정호(南廷鎬)·윤호규(尹鎬逵)·조헌석(趙憲錫), 규약기초위원에는 이우영(李遇榮)·윤호규(尹鎬逵)·남계원(南啓源)·주진복(朱鎭福)·조헌석(趙憲錫) 등이 있었다.

신간회 울진지회의 발기준비위원의 대부분은 3·1운동에 참여하였거나 울진청년회를 통해 청년운동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었다. 곧 울진 지역 사회 운동의 중심인물들이 신간회 울진지회를 주도하였던 것이다. 신간회 울진지회는 1929년 들어 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자 일제 관헌의 탄압을 받게 되어, 1929년 초에 신간회 울진지회의 간부들이 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만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투옥된 간부 중 총무간사 김병호는 법정 투쟁을 벌여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신간회 울진지회에서는 총회 개최가 일제의 집회 금지로 열리지 못하게 되자 임시대회를 개최하여 지회의 활동 방향을 결정짓고자 하였다. 1929년 3월 16일에 임시의장 한후석의 사회로 임시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대폭적인 임원 개선이 이루어졌고, 활동 방향에 관해서도 다양한 토의가 이루어졌다.

임원은 회장 장인환(張仁煥), 부회장 한후석(韓候錫), 서무부 총무간사 이우영(李遇榮)·상무간사 이중엽(李仲燁)·간사 진경문(陳慶文), 재정부 총무간사 윤호규(尹虎逵)·상무간사 주진복(朱鎭福)·간사 남왈성(南曰星), 정치문화부 총무간사 김용운(金龍雲)·상무간사 김계동(金啓東), 선전조직부 총무간사 최중모(崔仲模)·상무간사 윤홍중(尹弘重), 조사연구부 총무간사 최대열(崔大烈)·상무간사 장재환(張在煥) 등으로 개편되었다.

1928년 말 조선공산당이 해체되고 신간회 운동이 점차 개량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의 존속을 강조하는 세력과 신간회를 해체해야 한다는 세력과의 마찰 속에 결국 신간회는 1931년에 해소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신간회 울진지회 역시 해소되었다.

2. 울진공작당

울진공작당은 1931년 7월 15일 울진면 연지리 연호정에서 창립되었다. 창립총회에는 이우정(李愚貞)·윤두현(尹斗鉉)·주맹석(朱孟錫)·남왈성(南曰星)·주진황(朱鎭晃)·전영경(田永璟)·주병순(朱秉淳) 등 7명이 참석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과거 울진의 청년운동과 신간회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우정은 초기 울진청년회신간회 울진지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이우영의 동생으로, 1927년 만주로 건너가 남만청년동맹(南滿靑年同盟)에 가입하여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하였다가, 이듬해 6월에 귀향하여 신간회 울진지회에서 정치문화부 총무간사로 활동하였으며, 울진청년동맹 집행위원장, 강원도청년동맹 조사연구부장 등을 지냈다.

이우정은 만주에서 홍남표(洪南杓) 등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다가 1930년 일제의 검거를 피해 귀향해 있던 윤두현(尹斗鉉)과 새로운 운동 노선에 입각한 조직을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윤두현근남면 노음리 출신으로 1926년 도만(渡滿)하여 조선공산당 산하 중한청년회(中韓靑年會), 중국공산당 산하 중한농민협회 봉밀순자소조(峰密旬子小組) 선전부장으로 활동한 사람이었다. 이같이 울진공작당은 국외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던 인물들과 지역의 사회활동가들이 결합되면서 이루어졌다.

3. 창유계

창유계는 1937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폭해진 일제의 군국주의 파쇼 체제에서 생겨난 비밀 결사 조직이었다. 초기에는 남원수·장응두·노하순·최효대·장세전·전찬문 등이 중심이 되어 준향계(準香契)라는 조직으로 시작하였다. 계원은 9명으로 하고, 계의 목적은 상호 친목으로 하며, 계장은 최연장자인 최효대가 맡기로 하였다.

준향계가 활동하고 있던 1939년 여름 경 새로운 계(契)를 조직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울진농민조합의 목적을 계승하면서도 조선의 독립 및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런 필요성에서 그 해 10월경 창유계(暢幽契)가 결성되었다.

그 후 창유계(暢幽契)가 자체적인 모임으로 결속을 다지던 중, 1943년 3월 중경임시정부에 연결되어 밀파된 계원 남원수가 만주로 향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달 19일 계원 장세전은 지방의 정세를 전달하기 위해 다시 중경으로 출발하려 했으나 출발 전날 역시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를 계기로 창유계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단행되었다.

창유계 회원의 검거에 나선 일본인 울진경찰서장은 일본인 고등계 형사 여러 명과 조선인 이광호를 앞세워 계원인 최황순(崔晃淳) 집에 있던 사진을 근거로 수색을 시작하였다. 또 근남면 수산천 도선장에서 통행하던 청년 1명을 검문하던 중 계회 집회 통지서를 발견하고 계회에 참석하여 또한 검거하였다. 일본 경찰은 창유계 관련자 102명을 검거하여 울진연무장에 수감하였다가 61명을 무혐의로 석방하고 41명을 입건 구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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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유계 사건 관련 구속자

4. 최익한의 활동

울진군의 독립운동가 중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 최익한(崔益翰)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울진군 북면 나곡2리[속칭 골마]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는 사회주의사상에 의거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고, 해방 후에는 통일 민족국가 건설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또한 많은 국학 관련 저술을 남긴 사람이었다.

최익한은 3·1운동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뛰어 들어, 영주군에서 1천 6백 원을 모아 상하이로 보내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모집원으로 활약하였다. 최익한은 이 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을 언도받았고, 3년 만에 감형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당시 일본에는 재일본 조선인 유학생들의 단체가 결성되어 있었고, 이 단체들 대부분은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있었다. 최익한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과 접촉하게 되었다. 1925년 1월에 재일본 조선인들로 구성된 사상단체 일월회(一月會)에 가입하였고, 이후 재일본무산청년동맹, 신흥과학연구회 등에서도 활동하였다.

1926년에 사회주의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소련의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게 되자 중동학교의 동창이었던 박락종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사회주의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갔으며, 1927년 4월에 조선공산당 일본부 조직부장을 맡았다. 이후 그는 서울과 도쿄를 왕래하면서 조선공산당과 관련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조선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행해지자 도쿄에서 체포되어 징역 6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7월 대전형무소로 이감 도중 대전역에서 “조선공산당 만세!”, “조선민족해방운동 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1년을 추가 받아 7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였다.

최익한이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복역중이던 1934년 2월에 그의 장남 최재소(崔在韶)와 차남 최학소(崔學韶)가 울진공작당 사건에 연루되어 각각 징역 2년 6월형과 3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던 중 최재소는 복역중이던 1937년 3월 고문의 휴유증과 열악한 감옥 생활을 이기지 못해 옥사하였고, 최학소는 1943년 3월 다시 창유계 사건으로 검거되었으나 도중에 탈옥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일으켰던 독립운동의 흐름 속에 울진 지역에서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기 한 몸을 기꺼이 희생시켰다. 오늘날 이들 울진지역 독립운동가들은 대통령 표창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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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대통령 표창 및 건국훈장애국장에 추서된 인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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