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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510
한자 蔚珍鄕校釋奠祭
영어의미역 Semiannual Services in Honor of Confucius of the Uljin County School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내리 653-1[향교로 34-13]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제례
의례시기/일시 음력 2월 상정일|음력 8월 상정일
의례장소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내리 653-1[향교로 34-13] 울진향교 대성전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내리 울진향교에서 음력 2월과 8월에 유학의 사성·십철·칠십이현에게 제사지내는 의식.

[개설]

울진향교 석전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음력으로 매달 첫째 정(丁)이 드는 날]에 울진향교 문묘에서 사성(四聖)·십철(十哲)·칠십이현(七十二賢)에게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다. 또한, 선현과 선사들의 학문과 인격, 덕행과 사상을 단순히 이론으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숭모하고 존중히 여기며 스승을 높이하고 진리를 소중히 하는 기풍을 채득하기 위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각 지방의 향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新學制) 시행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다. 따라서 종교적 기능으로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 동지와 공자탄일 등에 제를 올리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중국에서는 한나라 이후 유교가 중요시되자 공자를 제사하게 되었다. 후한의 명제는 공자의 옛 집까지 가서 공자와 72명의 제자를 제사한 기록이 있으며, 당나라에서는 628년 공자를 선성, 안회를 선사라 해서 제사를 지냈다. 739년에는 공자에게 문선왕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명나라 초기에는 대학에 묘를 설치하고 대성전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태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이며, 372년(소수림왕 2)에 석전을 봉행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백제는 태학 설립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오경박사 등의 명칭이 『삼국사기』에 나오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아직기왕인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학에서 석전 의식을 봉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648년(진덕여왕 2) 김춘추가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을 찾아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이 설립되었다. 또한 717년(성덕왕 16)에는 당나라로부터 공자와 십철(十哲)[공자의 제자 중 학덕이 뛰어난 10명] 및 72명 제자의 화상을 가져 와서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 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고려에서는 국학[국자감 또는 성균관으로 고쳐 부름]에 문묘[선성묘 또는 문선왕묘라고도 일컬음]를 모셔 놓고 석전을 올렸고 왕이 직접 헌작(獻爵)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1398년(태조 7) 성균관을 설치하여 국립 최고학부의 기능을 다하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정전인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사성·십철과 송조육현 등 21위를 봉안하였고, 동대·서대에 우리나라 명현 18위와 중국 유현 94위 등 모두 112위를 봉안하고서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석전을 올렸다. 이를 위하여 성균관에는 학전과 학노비를 지급하였다. 지방에도 고을마다 향교가 있어서, 모두 330여 곳의 향교에서 중앙의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매년 두 차례씩 석전을 올렸다.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부터는 양력 4월 15일과 10월 15일에 석전제를 지내다가, 광복 후인 1949년 전국유림대회의 결의로 5성위와 송조 2현만 봉안하고 그 외 중국 유현 113위를 매안하기로 하였으며, 우리나라의 명현 18위는 대성전에 종향하였다. 그 후 춘추석전을 폐하고 공자탄일인 음력 8월 27일에 기념 석전을 봉행하다가, 1953년에 공문십철과 송조4현을 복귀하고 다시 제향일을 봄가을로 환원하였다. 지금도 성균관과 231개소의 지방 향교에서는 해마다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의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울진향교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내리에 있다. 1484년(성종 15)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월변동에 창건하였다. 1697년(숙종 23) 고성리 성저동로 옮겨 세웠다가, 1872년(고종 9)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월변동과 성저동에 있을 때의 교궁의 규모는 고증이 없어 알 수가 없고,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였던 대부분의 건물은 1950년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소실 이전의 건물 규모는 대성전 10칸, 명륜당 16칸, 동재 2칸, 서재 2칸, 내삼문 3칸, 제기고 2칸, 태고루 2층 6칸, 태고헌 6칸, 주사 12칸, 외삼문 3칸, 포사 4칸 등이다.

소실된 이후에 석전을 봉행할 때와 향원유림 집회 때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1957년 모성전 강당을 이축하여 사용하였다. 그 후 1979년에 명륜당 12칸을 준공하였고, 1984년에는 울진군의 지원금으로 사주정문을 세웠다. 1991년에는 대성전 단청을 시공하였고, 제물전 2칸을 신축하였으며, 대성전 측면 담장을 개수하였다. 1992년에는 서재를 6칸으로 중창하고 내삼문을 중수하였다. 현재 울진향교 대성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절차]

다음은 2004년 2월 28일 오전 10시 30분에 울진향교 대성전[당시 전교 남호열]에서 봉향한 석전제의 절차이다. 이날 초헌관은 김용수[당시 울진군수], 아헌관은 남용범[당시 76세, 울진읍 읍내리], 종헌관은 전찬경[당시 76세, 죽변면 후정리]이 맡았다.

석전제 전날 저녁에 제관, 집사 등 4명이 전설을 마치고 향교 내에서 하룻밤을 잔다. 석전제 당일이 되어 제관과 참배객이 대성전 뜰 앞에 정렬하면, 석전제의 진행 담당자인 도집예의 주관으로 알자(謁者)와 찬인(贊引)이 제관을 안내하여 대성전 안으로 들어간다. 그 후 제관들은 각자의 위치에 서며, 국기에 대해 배례를 한다.

개독이라하여 대축관이 각 위패의 뚜껑을 열면, 제관 전원이 한꺼번에 4번 절을 하는 참신을 수행한다. 그 후 대축관이 흰색 비단을 접어 폐백 함에 담아 5성 중 맨 먼저 공자, 그다음 순서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의 위패 앞에 바치는 행존폐례(行尊幣禮)를 시행한다. 그다음에는 시장, 군수, 전교 중의 한 사람이 초헌관이 되어 공자, 안자 등의 순으로 술잔을 올리며 대축관은 축문을 읽는 행초헌례(行初獻禮)를 시행한다.

그다음은 지방의 유지, 기관장 중에서 선정된 아헌관이 오성에게 각각 잔을 올리는 행아헌례(行亞獻禮)를 행하고, 지방 유림 중에서 선임 된 종헌관이 오성에게 각각 잔을 올리고, 세 사람의 제관이 한꺼번에 4번 절을 하는 행종헌례(行終獻禮)를 시행한다.

유림 중에서 선임된 8명의 헌관이 송나라 4현과 우리나라 18현 위패 앞에 각기 잔을 올리는 행분헌례(行分獻禮)를 행하고, 폐백을 드린 비단과 축문을 초헌관과 대축관이 대성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불을 사르고 그 재를 북쪽 땅에 구덩이를 파고 묻는 행망료례(行望燎禮)를 행한다. 알자가 초헌관에게 제례가 끝났음을 보고하면 제관 전원이 대성전 밖으로 나온다. 집사가 위패의 뚜껑을 닫은 후 모든 집사들이 4번 절한다. 이로써 석전제의 모든 의례가 끝난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