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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694
영어의미역 Seongnyugul Cave-Adamantine Underground Fortress Kept Buddhist Statues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집필자 장병관

[개설]

성류굴은 울진의 대표적 석회암 동굴로, 자연 조형이 금강산을 방불케 할 정도라 하여 지하금강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지금의 성류굴이란 이름은 임진왜란 때 생겨난 것으로 굴 앞의 사찰에 있던 불상을 이곳에 피난시킨 이후로 ‘성불이 머물던 굴’이란 뜻에서 성류굴(聖留窟)이라 불리게 되었다.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위치하고 있고 천연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성류굴은 수많은 관광객을 맞으면서 태고의 신비감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연간 20만 명 이상이 성류굴을 다녀간다고 한다. 그 결과 성류굴은 동굴 조명에 의해 이끼류 성장이 오염되고 있으며, 각종 시설물에 의한 지형 훼손, 관광객에 의한 종유석·석순 등의 파괴와 오염, 외부 공기의 유입과 온도 상승에 따른 동굴 생태계의 서식 변화 및 동굴 건조화와 박리 현상을 심하게 겪고 있어 보존 대책이 시급하다.

[다양한 유래를 지닌 천연 비경]

성류굴왕피천이 굽이굽이 선유산을 휘돌아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울창한 측백나무와 함께 사계절 관광객이 찾는 천연 석회암 동굴이다. 입구와 출구가 같은 장소에 따로 있는데 선유산(仙遊山) 절벽 밑, 왕피천(王避川) 가에 있는 좁은 바위구멍 그게 바로 성류굴이다. 머리와 허리를 완전히 숙여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험하지만, 이곳에 들어가면 자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 내부 온도는 1년 내내 14~16℃이다. 겨울 외투를 입고 들어가면 중간에 벗어야 할 정도로 포근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곳이다.

동해의 아름다운 비경 천연기념물 제55호인 울진의 성류굴은 수백 년 된 측백나무 군락에 둘러싸인 채 왕피천 자락에 곱게 앉아 있다. 성류굴은 일명 지하금강이라고 불리는 석회암 동굴로서 왕피천에서 흘러든 물이 석회암 지형에 침식 작용을 일으켜 만들어낸 것으로 생성 시기는 약 2억 5천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류굴은 전장 472m, 동굴 내부는 ‘ㄷ’ 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개의 못과 12개의 광장으로 형성되어 있다. 굴 입구에서부터 끝까지 태고로부터 이어온 신비의 경관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1963년 5월 7일 천연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성류굴을 부르는 이름에는 세 가지가 있다. 먼저 그 경치가 우아하고 신선들이 놀던 곳이라는 뜻에서 ‘선유굴(仙遊窟)’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속설에 의하면, 신라의 화랑인 영랑·술랑·남랑·안상 등 네 화랑이 굴속에서 놀았다 하여 선유굴이라 불렀다 한다. 임진왜란 때 성류사란 절이 이 부근에 있었는데 왜병들에 의하여 완전 소실되었다. 이때 성류사에 안치되어 있던 불상들을 이 굴로 피난시켰으며 따라서 불성(佛聖)이 머무르는 곳이라 하여 ‘성류굴(聖留窟)’로 개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가 탱천굴에서 수구다라니를 암송하니 굴신이 불교에 감화하였다고 하며, 보천태자가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성류굴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또한 『울진군지』에는 ‘장천굴(掌天窟)’이라는 명칭이 보이기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진덕여왕원효대사가 ‘천량암(天量庵)’을 이곳에 창건하여 수도했다고 전한다. 성류굴은 고려 말의 대학자인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의 「관동유기」 중에 북한 지역의 동용정(凍龍亭)과 함께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세조김시습(金時習)의 성류사 유숙 시, 김창흡(金昌翕)의 기문 등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러하듯 성류굴은 많은 유래를 가지면서 우리에게 역사를 전한다.

[신비의 과학 세계]

현재 문화재청에서 정의하는 동굴은 길이 10m 이상 땅 표면에 뚫린 자연적인 구멍을 말한다. 따라서 동굴은 생성 원인에 따라서 형태가 틀리게 나타난다. 땅 속 깊숙한 곳에 웅장하고도 화려한 지하 궁전의 모습을 이룬 것도 있고 좁고 험악한 산골짜기와도 같은 동굴도 있다. 또 그런가 하면 어떤 동굴은 커다랗고 기다란 터널로 되어 한없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 모두가 그 지역의 지질이나 환경 때문에 각기 나름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석회암 동굴인 성류굴은 석회암이 분포하는 지역에 용식(溶蝕)으로 생긴 동굴로 탄산칼슘을 주성분으로 하는 석회암층의 내부를 빗물이 용식해서 형성된 것으로 대체로 종유석(鍾乳石)이 있으므로 종유동이라고도 한다. 지하수는 모여서 암층 내에 일정한 유로를 만들고, 유로를 따라 큰 공동을 만든다. 동굴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종유석·석순·석주·동굴 진주·동굴 산호이다.

종유석은 크기나 모양이 매우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천장으로부터 아래로 내려올수록 점점 가늘어진다. 종유석으로부터 떨어지는 물이 바닥에 닿는 시점에 석순이 자란다. 또한 물의 계속적인 공급에 따라 종유석은 아래 방향으로, 석순은 위 방향으로 자라는 과정에서 이들이 맞닿아서 돌기둥인 석주가 형성된다. 동굴 진주는 바닥의 요지에 있는 작은 알갱이를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이 굴리면서 그 작은 알갱이 위에 탄산염광물이 침전되어 형성된다. 동굴 산호는 보통 물이 흐르지 않는 곳과 물이 매우 적게 떨어지는 건조한 곳에서 많이 발견된다.

성류굴은 금강산의 만물상을 방불케 하는 종유석·석순 등의 밀림지이다. 또한 동굴에는 4개의 연못이 있는데 이것은 왕피천과 연결되어 있어서 왕피천의 수위가 오르면 따라서 오른다고 한다. 굴 내의 최대 광장은 폭 18m, 길이 25m, 높이 18m이며 수심은 대개 4~15m이고 굴 내의 온도는 15~17℃로 연중 거의 변화가 없으며 수온은 15~16.5℃이고 습도는 91~95%이다.

성류굴의 동굴 부근을 구성하는 지질은 주로 석회암으로 되어 있고 천판암(天板岩)이나 편암(片岩) 등이 접하고 있다. 석회암층은 주향이 북은 30도~40도, 동은 70~80도로 북서쪽으로 경사되어 있다. 따라서 성류굴은 석회암 지대에서 발달되는 전형적인 석회 동굴이다. 석회암은 담홍색·회백색 내지는 백색을 띠고 있다. 성류굴은 모두 저에너지 동굴에 속하므로 관광객의 출입에 따라 동굴 환경이 매우 민감하게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 변화는 동굴 내에 성장하고 있는 동굴 생성물의 성장과 동굴 생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동굴 속 지하금강 체험]

가장 우리가 관심을 끄는 것은 소위 지하금강이라 불리는 전장 472m, 천고의 신비를 지닌 마굴 속의 경관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굴의 형상은 4연못 12광장에 수천의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지질계 학자들의 견해로는 굴 총장이 700~800m라 하나 예로부터 전설은 평해면 영치굴과 통해져 있다고도 하는데 탐험된 거리는 근 500m이고, 그 앞은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신비스런 경관을 예견하면서 호기심을 갖고 마굴 속을 들어다 본다. 입구 3m 지점에서 사다리를 타고 굴속으로 내려서면 거기서부터 시원 이래 볕을 보지 못한 칠흑의 암굴이 시작된다. 희한하게도 성류굴 입구는 무척 낮으면서 좁다. 성인이라면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데, 비만자는 들어가기가 무척 힘이 들 정도다. 그러나 좁은 굴 입구를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 본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널따란 공간에 우선 입이 벌어질 것이다. 좁디좁은 틈 안에 이다지도 거대한 공간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500m를 전진하는 동안 50여 평의 12개의 광장, 석간수가 고인 4개의 심연, 깎아 세운 듯한 석벽, 높이 15m의 대석탑, 두드리면 소리나는 석북, 형형색색의 석순, 석종 등이 연속된다. 도처에 석간수가 거울처럼 깔려있는 그 주위로 기묘한 대자연의 조각이 이룬 석벽의 웅장한 기괴성은 귀공신력(鬼工神力)으로도 만들 수 없는 조화의 미이다.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절경을 이루는 칠흑의 괴굴에 섰노라면 마치 예쁜 선녀들이 신주(神酒)를 따르며 반겨줄 것도 같은 반면에 마물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같은 황홀과 음산이 착잡한 요지경으로 이끌 것 같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은하천과 그 위에 놓인 오작교라고 불리는 무지개다리이다. 철제로 만들어진 두 개의 무지개다리에는 오렌지색 네온이 드리워져 있어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휘황한 조명 아래 은하천이 맑게 흐르고 있으며 왕피천에서 놀러 온 작은 물고기들이 조명 빛에 어른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류굴에 있는 4개의 연못은 모두 왕피천과 연결되어 있는데, 왕피천의 수위가 변화함에 따라 이 연못들의 수위도 수시로 변한다고 한다.

입구 3m 지점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이곳은 궤석(潰石)이 깔린 45도의 경사지이다. 슬픈 역사의 토막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의 가등청정 산하의 일지대가 울산으로부터 동해를 따라 진격해 옴에 그 위보를 들은 인근 주민 약 500여 명이 미리 성류굴 속으로 피란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를 탐지한 왜군이 동굴 입구를 막아 나오지 못하게 하여 굴 내의 피난민이 전원 굶어 죽기에 이르렀다. 그 증거로 입구 경사지에 깔린 궤석은 당시 왜군이 딴 곳에 있던 석괴로 봉쇄한 것이 무너졌음이 확실하고 지금도 잘 살펴보면 내부에 매몰된 인골을 볼 수 있다.

그 경사지를 내려서면 제1광장인 연무동 석실이 보인다. 넓이 200㎡ 높이 15m의 대광장이다. 통로의 오른쪽에 석간수의 못이 있고, 그 양쪽 벽과 천정은 기묘한 형을 이룬 석순·석종들로 꽉 차있다. 당대 최고 엘리트 화랑의 훈련장답게 주위를 용과 거북이가 지킨다. 다시 제1광장을 지나면 오작교 건너 제2광장을 볼 수 있는데, 약 400㎡의 넓은 광장 전역에 깊이 1m의 물이 고여 있고, 물 밑바닥은 점토이다. 미끄러워 도강에 힘이 들었으나 지금은 철가교가 놓여 있어서 관광객들을 편하게 해주고 있다.

여기서 위로 올라가는 약 10m의 소굴은 박쥐들의 서식처여서 박쥐의 배설물이 쌓여 있었다. 제2광장 은하천 등을 지나면 미륵불이 있는 제3광장인 약 60㎡의 소광장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석주와 석탑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질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 석주가 생성되자면 몇만 년은 걸려야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제3광장에서 제4광장으로 통하는 길은 S자 형의 낮은 소혈로 되어 있는데, 이곳의 석순은 속이 비어 있어서 두드리면 둥둥 소리가 나므로 속칭 석북이라 불린다.

제4광장은 넓이 100㎡ 높이 16m의 공간인데, 이곳에 15m의 웅장한 석탑이 있다. 석회암이 물에 녹아 흘러내리면서 큰 탑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이 석순의 규모로 미루어 성류굴의 연륜을 2억 5천만 년으로 추정한다는 푯말이 붙어 있는데, 2억 5천만 년은 얼마나 긴 세월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는다. 사람의 수명을 길게 100세로 잡는다 해도 250만 배나 되는 긴 세월이라니... 그저 ‘아!’하는 감탄사 외에는 마땅한 반응도 없다. 2억 5천만 년의 세월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낸 통일기원탑, 땅에서 자라나는 석순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종유석이 닿을 듯 닿을 듯 만나지 못하고 있다.

속칭 ‘마의 심연’이라 불리우는 곳인 제5광장, 넓이 약 400㎡의 시퍼런 심연에 철가교가 놓여 있다. 물의 깊이는 8~10m라 하나 물 밑의 바닥이 석순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곳도 있다. 이 심연의 사방에는 수많은 돌고드름이 내려져 있어 마치 병풍을 친 것과도 같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굴의 극치는 아마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밝게 조명해 보면 마치 신궁에나 들어온 착각이 든다. 보천태자가 있었다는 제5광장 용신지(龍神池)이다.

약 1400년 전 신라시대에 제5광장에서 보천태자가 수도에 열중하고 있을 때 그 앞에 굴신(屈神)이 나타난다. 굴신을 상대로 다라니경을 외우는 보천태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성류굴 안에 울려 퍼지고, 그 순간 굴신이 교화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본디 설화라는 것이 완벽한 픽션은 아니다. 설화는 행간 속에 어떤 사건이나 정책을 내포한 고도의 상징체계이다.

때는 통일 직후인 신문왕 시절,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지방 호족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졌던 시기다. 교화를 시킨 주체는 신라의 왕자요, 교화를 당한 대상은 지역의 토착신이며, 교화를 시킨 도구는 다라니경 즉 불교다. 즉 불교의 전파를 통해서 왕권을 강화 이야기를 알 듯 모를 듯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성류굴만이 줄 수 있는 재미있고 독특한 교수 방법이다. 역사는 원래 강요하고 외우는 주입식 교육을 하지 않는가 보다. 또한 제5광장을 지나면 ‘선녀의 밀실’이라는 전래 동화 제목인 듯한 푯말이 붙은 못이 등장한다.

제6광장에 이르는 길은 2층 석계로 함정이 있어 위험한 지대이기도 하다. 다기암(多奇岩) 지대이며, 좌측 소광장에는 수많은 석회 동굴이 뚫어져 있다. 제7광장과 제8광장은 맑은 석천, 기기괴괴한 종유석, 석순 등이 수없이 펼쳐져 있고 사방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소혈이 뚫어져 있다. 제9광장은 금강의 만물상을 방불케 하는 종유석·석순 등의 밀림지이다. 규모는 남북 간 약 50m, 동서 간 17m 가량이다. 이곳의 바닥에는 많은 박쥐똥 등의 퇴적물이 있으며, 이 동굴에서 유일하게 오염이 안 된 부분이기도 하다. 동굴 안의 온도는 연중 15~17℃로 거의 변함이 없다.

또한 제9광장인 수레동은 나약한 인간의 삶을 조롱하는 자연의 웅장함을 볼 수 있다. 천장에 달린 종유석과 바닥에 형성된 석순이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조금씩 다가가다, 마침내 허공에서 만나 석주라는 또 하나의 질료를 탄생시킨 과정이 엿보이는 광장이다. 석주는 하늘을 떠받칠 듯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고, 그 옆에는 또 다른 석주들이 일 년에 겨우 0.4㎜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앞으로 2억 5천만 년 후에는 또 다른 석주들이 탄생할 것이다. 그 억겁의 시간 속에 인간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

석순의 밀림은 작은 통로로 계속 이어지며, 여기 확 트인 제10광장에 이르면 시간과 자아를 망각케 하는 선경을 느낀다. 자연력의 웅대한 황홀경은 여기에서 극치를 이룬다. 이곳 광장의 선경을 벗어나면 전방 40m 지점에 용궁을 연상케 하는 대광장이 제11광장이 등장한다. 부처님 세 분이 일렬로 서 계신 듯하다 해서 삼불상이라 불린다. 이 광장이 걸어서 들어 갈 수 있는 마지막 광장이고, 앞으로는 등산용 로프를 타고 제12광장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제11광장의 막바지에 약 5m 높이의 절벽 위 천정에 구멍이 있어, 로프를 걸고 이를 넘어서면 예상 외의 넓이 600㎡ 규모의 제12광장인 대광장이 눈앞에 나타나고 절벽을 내려서면 오른쪽에 심연이 있고 앞길은 막혀 있다. 여기가 지금까지 탐험된 이 굴의 마지막 지점이다. 그 중에서도 종유석과 석순이 영롱한 보석처럼 자라나 제12광장을 보물섬이라 부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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