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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737
한자 黃萬英記念碑
영어의미역 Monument for Hwang Manye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423-8[월송정로 449]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인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양식 이수, 비신, 비좌를 갖추고 있는 석비
건립시기/일시 1976년 10월연표보기
관련인물 황만영
재질 화강암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423-8[월송정로 449]지도보기
소유자 평해황씨 종중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있는 애국지사 황만영을 기리는 기념비.

[개설]

황만영(黃萬英)은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늑결 후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향리에 주둔하고 있던 성익현(成益鉉) 의진(義陣)에 군자금 800냥을 지원하면서 의병 활동을 격려하였다. 그 후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창건되자 회원으로 가입하여 향리인 사동(沙銅)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한 뒤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설립된 신흥학교(新興學校)의 재정을 담당하였으며, 1913년에는 노령(露領) 지역으로 건너가 그곳의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참가하였던 황만영은 1919년 9월 주진수(朱鎭洙) 등과 함께 만주로 파견되어 순회 강연을 개최하면서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한편 1925년 정의부(正義府)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하기 위해 길림(吉林)에서 상해로 갈 때, 동행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5년 8월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들어와 1927년 신간회가 설립되자 신간회 울산지회 회장에 선임되어 민족협동전선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건립경위]

애국지사 황만영의 숭고한 애국 애족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사업위원회를 구성, 1976년 10월에 건립하였다.

[위치]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국도 7호선에서 월송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평해황씨 제단원 입구에 있다.

[형태]

비석은 이수와 비신, 2단의 비좌를 갖추고 있으며, 둘레에는 돌난간을 둘렀다. 비석의 앞면에는 ‘애국지사국오 황만영선생기념비(愛國志士菊塢黃萬英先生紀念碑)’라 새기고, 옆면과 뒷면에는 황만영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금석문]

비석의 앞면에는 ‘애국지사국오황만영선생기념비(愛國志士菊塢黃萬英先生紀念碑)’라 새기고, 옆면과 뒷면에는 황만영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애국지사 국오(菊塢) 황만영(黃萬英) 선생의 관(貫)은 평해요 자(字)는 응칠(應七)이며, 원조(遠祖) 유한학사(有漢學士) 휘(諱) 낙(洛)의 후(后)요 행공조참의(行工曹參議) 증이조참판 해월(海月) 휘(諱) 여일(汝一)의 10세손이며 휘 수(洙)의 자(子)라. 단기 4208년 서기 1875년 을해 6월 20일 원평해군(元平海郡) 사동(沙銅)에서 전가충의(傳家忠義) 속에서 태어나셨다.

관인(寬仁)한 도량(度量)과 강직(剛直)한 지조(志操)는 모든 신망(信望)을 한 몸에 지녔으며 소년학방시(少年學房時)에 문필이 웅휘하고 특히 신구병서(新舊兵書)에 조예(造詣)가 깊으시었다. 때는 과거 반세기(半世紀) 동안 일제(日帝)의 침략(侵略)은 이 나라를 짓밟고 한민족을 여지없이 압박하는 이래 수많은 애국지사는 항일 구국에 생명과 재산을 던져가면서 중첩(重疊)한 신고(辛苦)로 침략자를 저항하여 온 기중 한 사람이 국오(菊塢) 선생(先生)님이시다.

일제는 서기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과 1904년 노일전쟁(露日戰爭)에 전승(戰勝)을 득한 여위(餘威)의 마수(魔手)로 한국을 침략함이 노골화되어 소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인 치욕의 늑약(勒約)을 받게 되자 국내의 풍운은 날이 갈수록 험악일로(險惡一路)로 되어갔다.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선생께서 솔선적으로 엽전 800냥을 내둔(來屯) 중인 성익현(成益鉉), 호좌진(胡佐眞)의 진(陣)에 희사격려(喜捨激勵)하였고, 누차 상경하여 양기탁(梁起鐸) 외 제사(諸士)들과 구국의 대의를 논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와 관동학회(關東學會)의 일원이 되었고 위선 구국의 길이 국민교육(國民敎育)을 신문명개화(新文明開化)로 지향하여야 된다 하시고 울진 주진수(朱鎭壽) 동지의 매화만흥학교(梅花晩興學校) 설립과 동시 1907년 평해군 최초로 사동대흥학교(沙銅大興學校)를 사재로 창설하고 영재(英材)를 배양하여 오시다가 1910년 경술 8월 29일 민족사상 최대 오점인 한일합방의 국치(國恥)를 당하자 적괴(賊魁)는 양학교(兩學校)를 배일(排日)의 온상이라 하여 모두 폐쇄하였다.

선생은 실국(失國)을 당한 분한은 좌이대사(坐而待死)할 때가 아니라 생각하시고 1911년 국내항일지사(國內抗日志士)들과 성맥(聲脈)을 상통하여 만주 서북간도(西北間島)를 이민영농(移民營農)과 독립군양성근거지(獨立軍養成根據地)로 택정(擇定)하고 의병잔여부대(義兵殘餘部隊)와 함께 농호이주(農戶移住)가 시작되었다.

위선 인접군(隣接郡) 제동지(諸同志)인 안동(安東)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영해(寧海) 만성(晩醒) 박경종(朴慶鍾), 울진(蔚珍) 백운(白雲) 주진수(朱鎭壽), 평해(平海) 일오 황병문(黃炳文), 백랑(白浪) 안규원(安奎源) 외 제공(諸公)의 선두영도(先頭領導)로 일거 수백호가 도만(渡滿)하여 연강제현(沿江諸縣)에 정착하면서 만인토지(滿人土地)를 조자임대(租子賃貸)로 영농하고 학교도 설립하였다.

후방의 이러한 모든 준비에 선생은 재정원조(財政援助)를 계속하시었으며 그동안 적헌병(敵憲兵) 망양분견소(望洋分遣所)에 누차 호출을 당하여 감금도 되었다. 1912년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도착하여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선생을 도와 신흥학교(新興學校) 설립에 재정적 후원을 하여 가면서 영농주선(營農周旋)에도 심혈을 다하시었다.

1913년 춘에 재서비리아(在西比利亞) 대한국민의회에 참석하시어 문창범(文昌範) 외 제 동지들과 결사구국을 맹약하고 니코리스크에서 이상설(李相卨) 선생을 문병한 후 동만귀로(東滿歸路)에 동청철도(東淸鐵道)로 제제합이(齊齊哈爾)에 올라가 흑룡강성도(黑龍江省都)에서 장종창독군(張宗昌督軍)을 예방하고 필담으로 한국독립운동(韓國獨立運動)에 관한 심회(心懷)를 통한 바 장 독군(張督軍)은 필답(筆答)으로 조선형제일양적극보한족(朝鮮兄弟一樣的極保韓族)이라 하고 후대(厚待)도 받으셨다.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함에 선생은 독립군 투사들과 자주 자리를 같이 하면서 약한 힘이나마 우리는 더욱 공고히 하여야 된다 하시고 모든 외사(外事)에 참여하시었다. 적나남사단(敵羅南師團)의 국경수비대(國境守備隊)는 우리 독립군의 월강기습(越江奇襲)을 당하여 많은 희생을 자주 보게 되여 차(此)의 보복전(報復戰)으로 연강(沿江) 독립군에게 끊임없는 수색토벌(搜索討伐)을 가하여 왔으며 그 야수적(野獸的) 만행은 교포부락(僑胞部落)에 방화하고 천인이 공노할 무고(無辜)한 아녀자까지도 총검살상(銃劍殺傷)을 자행(恣行)하였다. 우리 군대는 지리를 잘 이용하여 사살격퇴(射殺擊退)를 여러 차례 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선언운동(大韓獨立宣言運動)이 국내외에서 궐기되어 세계열강에게 한민족의 자주 독립성을 선양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상해(上海) 불조계 (佛租界) 내에 수립하게 되었다. 만주에서는 임정서로군정서(臨政西路軍政署)를 설치하고 이상룡(李相龍) 선생이 독판(督辦)으로 추대되어 상해와 만주 간에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차 단합에 있어서도 박경종(朴慶鍾), 주진수(朱鎭壽) 제 동지와 함께 진력(盡力)하시었고 그후 상해임정(上海臨政)에 가셔서 제 요인을 만나 자금 조달의 중임을 분담하고 길림성(吉林省)으로 돌아오셨다.

1923년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밀양인(密陽人) 윤필환(尹弼煥)에게 자금조달(資金調達)의 임무를 맡겨 국내로 보내었다. 대구에서 구년흠(具年欽)과 양근환(梁槿煥)이 합력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양근환(梁槿煥)은 상해로, 구년흠(具年欽)은 영안현(寧安縣)에서 선생과 상봉하였고 윤필환(尹弼煥)은 밀양(密陽)에서 적경(敵警)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5년 상해임정(上海臨政)에서 이상룡(李相龍) 선생을 국무령(國務領)으로 기용하게 되어 선생은 이석주장(李石洲丈)과 함께 상해로 향하게 되니 모든 일에 청렴결백한 국오(菊塢) 선생에게 재정의 중임을 맡아보게 한 것이었다. 한때 교통부차장(交通部次長)으로 선생을 내정까지 하였으나 석주장(石洲丈)은 3개월 만에 사퇴함에 또 함께 길림성(吉林省) 서란(舒蘭)으로 돌아오셔서 혈서로 국내지인(國內知人)과 본댁에까지 호소문(呼訴文)을 발송한 후 유하현(柳河縣)으로 가셨다가 동년 8월에 국내로 잠입하여 입수한 자금을 송치(送致)하고 신병이 인발(因發)되어 자택에서 경찰의 요시찰(要視察)을 받아가면서 치료하고 계셨다.

1927년 2월 15일 당시 전국 내 각파 단체가 모든 분야의 편견(片見)에서 활동하던 15단체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민족단일협동전선신간회(民族單一協同戰線新幹會)가 창립되어 3만 회원에 위원장으로 김병로(金炳魯) 변호사가 추선(推選)되고, 우리 울진에서는 국오(菊塢) 선생이 지부장(支部長)으로 선임되어 모든 새 사업에 건투(健鬪)하여 왔으나 과감한 항일 운동은 일제의 만주사변 시발의 계기로 1931년 5월 17일 전국적으로 적경(敵警)의 강제 폐쇄를 당하였다.

선생은 그 후 금강산에 은거하여 국제 추세를 관망하시던 중 국외풍상(國外風霜) 십여 년에 병약되신 몸은 중태로서 귀가하여 광복의 기쁨을 못 보시고 차세(此世)를 영별(永別)하시니 때는 단기 4272년, 서기 1939년 을묘(乙卯) 3월 7일이고 향년 65세이며 장례식은 사회장(社會葬)으로 행하려 하였으나 경찰의 불허(不許)로 향파임장(鄕派任葬)으로 거행하였는데, 경찰은 당일 사복 순사를 파견하여 필역종일(畢役終日)토록 감시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숭고하신 구국정기(救國精氣)를 정신적 교훈으로 후인에게 귀감(龜鑑)삼기 위하여 본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委員長) 안용훈(安鎔薰), 총무 안용발, 남종술(南鍾述)과 시종경기(始終經紀)하여 여(與) 김병두(金炳斗), 김성출(金盛出), 박명암(朴命巖), 황덕기(黃德基), 황재헌(黃載憲), 황덕출(黃德出), 안경석(安慶錫), 황재홍(黃載洪), 황봉석(黃奉錫), 안병국(安柄國), 안병찬(安柄贊), 황지성(黃志聲), 황태산(黃泰山), 황재훈(黃載勳), 황윤석(黃允錫), 황재열(黃載烈), 문중 대표 황재우(黃載宇), 황의석(黃義錫), 황익흠(黃翼欽), 이만기(李萬麒), 황대봉(黃大鳳), 황룡학(黃龍學), 서정백(徐廷伯), 제동중학교 대표이사 장성업(張聖業), 영천황씨종중회(永川黃氏宗中會), 영양석물 공장장 황조석(黃造錫) 및 위원제위(委員諸位)와 황씨첨종(黃氏僉宗)으로 반세육력(半歲戮力)에 구재벌석(鳩財伐石)하여 울진근고사(蔚珍近古史) 전영경(田永璟) 찬(撰)으로 영기불후(永記不朽) 기광운이(其光云爾)라. 단기 4309년 병진 10월, 전영경(田永璟) 근찬(謹撰).”

[현황]

비석이 건립된 지 오래되지 않았고, 황만영평해황씨 문중의 큰 인물이라 관리가 매우 잘 되고 있어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의의와 평가]

황만영은 경상북도 울진군 출신으로서 독립 운동 참여 행적이 뚜렷한 대표적 인물로서, 평해황씨 문중뿐만 아니라 울진군민 모두의 존경을 받아 자긍심을 높여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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