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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왕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495
한자 安逸王城
영어의미역 Anirwangseong Fotress
이칭/별칭 안일왕산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북면 두천리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이희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산성
양식 테뫼식
건립시기/연도 신라시대
관련인물 실직국왕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북면 두천리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북면 두천리에 있는 신라시대 산성.

[건립경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울진현 고적 안일왕산성조에는 ‘석축주칠백오십삼척금폐(石築周七百五十三尺今廢)’로 기록되어 있다. 안일왕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작 당시인 1530년에는 이미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안일왕성의 축성 기원과 연대에 대해서 『울진군지』에는 ‘실직왕(悉直王)이 도적의 난을 피해 현의 서쪽인 소광리 세덕산 위에 석성을 축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일왕성은 처음부터 석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사료들에는 모두 ‘안일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는 753척으로 공통되어 있다. 753척은 당시의 교정 척도로 환산해보면 약 250m이다. 그러나 안일왕성은 실제로 약 1.1㎞ 길이가 조사되어 753척은 초기의 크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울진읍에서 출발하여 국도 7호선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수산교가 있다. 여기서 서쪽을 향해 포장된 국도 36호선을 따라 1시간 정도 달려가면 불영계곡이 도로를 따라 연이어져 있다. 불영계곡불영사를 뒤로 하고 10여 분 가면 세덕산(細德山) 아래에 금강송면사무소 소재지인 하원리 수평마을에 이른다. 수평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거리에 광천교가 있다.

광천교에서 북쪽의 비포장 산길을 따라 세덕산을 오른쪽에 두고 계속 나아가면 약 3.5㎞ 거리에 솔평지[松坪地]마을이 있다. 솔평지를 거쳐 몇 개의 계곡을 가로질러 올라가면 산은 점점 깊어지고 계곡의 수량도 많아진다. 솔평지에서 북쪽으로 1.2㎞ 떨어진 지점의 계곡가에는 바위를 철책에 둘러놓았다. 이곳은 장군터로 불리는 곳으로 몇 년 전에 바위에서 안일왕산성과 관련된 음각 명문이 발견되어 학계에 깊은 관심을 보인 곳이다.

장군터[將軍基]의 명문 바위를 거쳐 다시 북쪽으로 2㎞ 올라가면 대광천이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십이령(十二嶺)을 향해 1시간 40여 분 걸어 올라가면 산불이 나 온 산을 까맣게 태운 일대가 나타난다. 여기서 한 개의 고개를 넘으면 석축의 돌무지로 나타나는 안일왕성이 위치한다. 안일왕성은 성 위에 올라서면 동쪽으로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일 정도로 이 일대를 사방으로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산성지이다.

[형태]

안일왕성은 8~9부 능선에 일련의 석축열로 산정을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다. 도착점을 시작점으로 하여 주회하며 성의 잔존 여부를 살펴보면 성 밖으로는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급경사를 만들어 놓았다. 현존하는 성벽의 상면 폭은 약 260㎝로 석축과 토석 혼축이 병행되어 있다. 성 안으로는 폭 480㎝의 내부 회곽도가 평탄하게 닦여 있다.

시작점에서 동쪽으로 220m 지점에 이중의 성벽이 연이어져 연결되어 있다. 각 성벽의 폭은 410㎝, 350㎝이며, 높이는 약 2m 정도 남아 있다. 길게 늘어선 두 개의 성벽 사이의 폭은 350㎝로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의 성벽이 긴 갈고리 모양으로 그 끝은 휘어 남쪽으로 꺾여 있다. 이는 문지의 방어를 더욱 튼튼히 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곳으로 나가면 불영사불영계곡으로 가는 산로와 만난다. 이곳은 울진으로 향하는 당시의 주 출입구인 남문지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남쪽의 성벽은 일단 끝나고 깊은 계곡으로 이어진다.

다시 성 안을 가로질러 동쪽의 성벽을 향해 올라가면 성 안에는 가경(嘉慶) 19년[1814] 갑술(甲戌) 윤2월 10일에 세운 하현형(下弦型) 비석 1기가 있으며, 성돌로 둘레돌을 돌린 원형 봉토분 1기가 있다. 묘를 지나 동쪽으로 가면 산록의 끝 지점에 동쪽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서벽과 마찬가지로 남북으로 뻗어내린 능선을 이용하여 동쪽은 자연 경사를 이루었으며, 성 안쪽의 벽은 토석 혼축의 내탁법으로 축조하였다. 동쪽 성벽의 중간 지점에는 감태바우라는 커다란 바위가 돌출되어 있다.

능선을 따라 북쪽을 향해 올라가면 80여 m 떨어진 지점에서 성벽은 서쪽으로 꺾이며, 꺾인 점에서부터 30m 떨어진 지점에는 높은 석대가 있다. 이 석대는 자연적으로 솟아오른 바위이나, 그 상부를 인공적으로 조금 다듬어 성의 시설물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대는 폭이 11m로 망루나 장대로 이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곳에 올라서면 북동쪽과 북서쪽의 산수는 물론, 동쪽의 동해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일대의 성벽은 토석 혼축으로 협축법을 이용하여 축조되어 있다. 이 구간 성벽의 폭은 2m이며, 성 밖은 경사가 급하여 적이 쉽게 내침할 수 없는 가파른 형국이다.

제1망루를 지나 성벽을 따라 서북쪽으로 가면 성벽이 토석 혼축에서 석축으로 바뀌는 구간이 나온다. 제1망루에서 서쪽으로 240m 떨어진 지점에 제2망루지가 있다. 망루는 동서 길이 585㎝, 남북 길이 580㎝인 방형의 단으로 높이는 120㎝이다. 단은 다듬지 않은 산석(山石)을 절석(切石)하여 흩은층쌓기로 축조되었다.

이곳 역시 주위를 조망하기에 매우 좋은 곳으로 북편 일대는 물론이고 성 안의 동정도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성 안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이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남북으로 뻗어내린 성벽이 두 팔로 성 안을 아늑하게 감싸 안은 듯한 형국이다. 이곳에서 불영계곡쪽을 바라보면 솔평재와 울진을 잇는 최근에 개설된 임도(林道)가 한눈에 들어온다. 안일왕성은 이 임도를 이용하여 솔평재에서 올라오면 더욱 쉽게 오를 수 있다.

제2망루에서 서남쪽으로 연이어진 구간의 성벽은 역시 협축법으로 축조되어 있다. 성벽의 상면 폭은 2m 내외이며, 현존하는 높이는 145㎝ 정도이나 원래는 더 높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성돌의 크기는 중석은 평균 45×16㎝이며, 대석은 평균 68×48㎝이다. 성벽은 다듬지 않은 막돌흩은층쌓기로 축조되었다.

제2망루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110m 서진하면 다시 성벽은 남쪽으로 꺾인다. 이곳부터는 경사가 내려가는 곳으로 다시 편축법의 토석 혼축성이 남아 있다. 성벽 상면의 폭은 3m 내외이며, 높이는 2.5~3m 정도 남아 있다. 성 안쪽으로는 폭 9~10m의 내부 회곽도가 마련되어 있다.

성벽이 꺾인 점에서 남쪽의 성벽을 따라 200m 떨어진 지점에는 서문지(西門址)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문지의 폭은 2m이며, 좌우에는 당시 문지를 지탱했던 석재들로 판단되는 길이 71㎝, 높이 40㎝, 두께 20㎝ 전후의 장대석이 나뒹굴고 있다. 서문지에서 220m 남쪽으로 내려오면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구간과 만난다.

안일왕성의 총둘레는 성벽이 일부 유실된 점을 감안해서 약 1.1㎞에 이른다. 성벽은 편축법으로 축조한 토석 혼축성과 협축법으로 축조한 석축성이 혼재하며, 2개의 망루지와 2개의 문지가 확인되었다. 성 안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수풀이 너무 우거져 확인할 수 없었다.

[현황]

성 안 서문지 부근에는 가장 많은 유물이 산재해 있다. 이 일대에 다수의 와편이 나뒹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문지의 상면에는 약식이긴 하나 문루를 가진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와편들은 명문와(銘文瓦), 막새류, 등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진 평와류 등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판단할 수는 없으나, 고려시대에 임시 피난처인 안일왕성을 위해 이 일대의 어느 곳에서 급히 제작된 중하품들로 판단된다.

성의 북쪽에는 17명을 능히 수용할 수 있는 큰 굴이 있다. 굴 안에는 산에서 석용를 채취하던 사람들이 줄을 타고 내려가다 발견했다고 하는 커다란 철솥 2개가 있다. 한편, 장군터에서는 안일왕성과 관련된 울진 소광리 황장봉계표석(黃腸封界標石)이 발견되었다.

[의의와 평가]

성 안에서 채집된 유물은 극히 작은 편들이긴 하나, 지표상에서 유리된 삼국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걸친 회청색 경질의 토기편들이 있다. 이 토기편들은 극히 소수여서 기형을 판단할 수는 없으나, 이 시기에 이미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반영해주는 자료다. 즉, 토기편들은 안일왕성의 초축 시기를 삼국시대까지 올려볼 수 있는 근거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이를 위한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양이 채집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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