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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701
한자 朝鮮王朝-故鄕-蔚珍-胎室-
영어의미역 The Other Hometown of Joseon Dynasty - Placenta Jars in Ulji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심현용

[동양 유일의 한국 문화, 왕실의 장태 풍속]

조선 왕실은 자녀가 태어나면 태실(胎室)을 조성하여 태(胎)를 땅속에 묻었다. 이때 땅 속에 뚜껑을 갖춘 돌로 만든 태함(胎函)을 마련하고 그 안에 태를 담은 백자 항아리와 생년월일 및 태를 묻는 날을 새긴 태지석(胎誌石) 등도 함께 묻었다. 태실 앞에는 태비(胎碑)를 새웠으며, 태봉산을 지키는 사람을 두었고, 태봉의 둘레 일정 구역을 함부로 범하지 못하도록 금표(禁標) 비석도 세웠다. 또 왕실의 태실이 완성되면 건립의 시말 기록과 일부 도면 등을 담은 일종의 보고서인 의궤를 함께 만들어 보관하였다.

이렇게 조선은 자녀의 출생 시부터 자손의 앞날에 매우 신중을 기하였다. 이렇게 한 가장 큰 이유는 대가 끊기지 않도록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데서부터 기인했는데, ‘자식은 잘 길러야 반타작’이라는 속담이 보여주듯이 유아 사망률이 높은 옛날에 출생은 곧 생존을 위한 고난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왕실에서의 장태(藏胎) 풍속은 동양의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유일의 문화이다.

일반 백성들은 왕실의 태실이 자기 고향에 오는 것을 큰 영예로 생각하였으며, 태실이 설치되는 지역은 그 읍격이 승격되기도 하였다. 백성들은 왕실의 뿌리가 자기 지역에 설치되는 것을 통해 왕실과의 일체감을 느꼈던 것이다. 울진 지역에도 태실이 5기나 조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울진 지역에 이렇게 많은 태실이 설치되었던 것은 지리적 조건이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에 울진 지역에서는 큰 인물이 배출되지 않았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태실의 이모저모]

1. 태실의 기원

태를 봉안하는 풍습에 대한 기록은 신라시대 김유신의 태를 묻었다는 『삼국사기』에 처음으로 보인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가장 활발하게 행해졌는데, 이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그 맥락을 승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죽계별곡』 등의 기록으로 보아 우리나라 왕실에서의 태실제도는 고려시대에 확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 세종 18년 8월 신미(辛未)조를 보면, 음양학자 정앙이 올린 상소 가운데 당나라 때 일행의 소찬(所撰)인 『육안태지법(六安胎之法)』을 소개하고, 사왕(嗣王)의 태를 그 법에 따라 안장시키라고 진언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중국 당대의 육안태법으로 세종 때 태를 묻는데 있어서 장태길일의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우리나라가 중국 당나라의 안태 풍속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장태 풍속은 김유신의 장태 기록과 “태경지설(胎經之說)은 신라와 고려조 간에 시작된 것으로 중국 옛날 제도가 아니다.”라고 한 『선조수정실록』으로 보아 태실은 우리 고유의 풍습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현재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러한 왕실의 장태 문화가 보이지 않는다.

2. 안태의식(安胎儀式)

새 생명의 탄생은 개인에게는 가문을 이어주는 성스럽고 경사스러운 일이며, 특히 왕실에서의 출산은 온 나라의 기쁨이자 축복된 일이다. 왕실에서 여자가 임신하게 되면 출산에 대비한 산실청(産室廳)이라는 기구가 마련된다. 산실청의 배설(排設)은 출산 전 5~3개월 사이에 이루어지며, 아기 탄생 후 초이레[7일]가 되면 해산된다.

산모가 아기를 출산하게 되면 태는 길일을 택하여 깨끗하게 백 번 씻은 다음 태항아리에 넣는다. 태는 작은 태항아리에 담는데, 먼저 항아리 바닥에 동전을 앞면이 위로 가게끔 놓은 다음 태를 그 위에 놓고 기름종이를 항아리 입구에 덮게 된다. 그 위에 다시 남색 명주로 덮고 난 후 빨간 끈으로 단단히 묶는다. 그 다음 큰 태항아리 안에 솜을 깔고 작은 태항아리를 넣은 다음 그 사이를 솜으로 다시 채우고 뚜껑을 덮어 빨간 끈으로 외면을 단단히 묶는다.

끈에는 장방형의 목간(木簡)을 매다는데, 앞면에는 ‘모년모월모일○○씨탄생○아기씨태(某年某月某日○○氏誕生○阿只氏胎)’라 묵서하고 뒷면에는 ‘호산청사무관○○○호산관○○○(護産廳/事務官○○○護産官○○○)’라고 묵서한다. 마지막으로 의녀(醫女)가 넓적한 독에 태항아리를 넣은 후 길방(吉方)에 안치한다.

다음에는 태를 태실까지 봉송하는 절차와 봉안하는 의식이 있게 된다. 태봉(胎峯)이 선정되면 승지가 정각에 내시로부터 태항아리를 받아 안태사(安胎使)에게 전한다. 안태사는 태봉으로 출발한다. 마지막으로 태실 조성 전후로 하여 토지신에 보호를 기원하는 제례를 치른다. 장태는 왕자의 경우는 5월·5년·7년을, 왕녀의 경우는 3월·3년·15년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태봉등록(胎峰謄錄)』에는 남아의 경우 5개월에, 여아의 경우는 3개월에 장태한다고 하였으나 그대로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3. 태봉의 조건

태봉의 조건은 『현종개수실록』에 “들판 가운데(野中)의 둥근 봉우리를 택해서 그 정상에 태실을 만드는 것이 국속의 제도이다.”라 하였으며, 『태봉등록』에는 “무릇 태봉은 산 정상에 내맥(來脈)이 없는 곳이며, 용호를 마주보는 곳을 써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세종실록』에도 “좋은 땅이란 것은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해야만 길지가 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지형을 풍수지리적 용어로 돌혈(突穴)이라 하는데, 반구형의 산 정상에 태실을 조성하도록 한 것은 정상에 집중된 땅의 지기(地氣)를 흡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태봉의 입지는 명당(明堂)의 조건에 따라 3등급으로 나뉘며, 1등급에는 왕, 2등급에는 대군(大君)과 공주, 3등급에는 왕자와 옹주의 태실을 조성한다. 금표 구역 역시 태실을 중심으로 왕은 300보[540m], 대군과 공주는 200보[360m], 왕자와 옹주는 100보[180m]로 규정하였다.

4. 태실의 구조

태실의 구조는 아기 태실(阿只 胎室)과 가봉 태실(加封 胎室)로 구분할 수 있다. 아기 태실은 왕실에서 태어난 모든 아기의 태를 처음 묻은 시설을 말한다. 구조는 태봉 정상에 광을 판 다음 그 안에 태항아리와 지석을 넣은 태함을 매납하고 지상에 무덤과 같이 봉분을 만들고, 그 앞에 비석을 세운다.

가봉 태실은 아기 태실의 주인공이 왕으로 등극하면 아기 태실에 추가로 석물을 장식하는 것으로 왕비 태실도 해당된다. 구조는 처음 조성된 아기 태실의 지하 구조는 그대로 두고 지상의 봉분을 없애고 그 위에 부도(浮屠)와 비슷한 석물을 조성한 후 팔각난간석(八角欄干石)을 둘러 화려하게 외부를 치장한다. 그리고 귀부와 이수가 있는 비석을 세운다.

[울진에는 어떤 태실들이 있는가]

지금까지 울진 지역에서도 5개소의 태실이 조사되었는데, 나곡리 태실, 사계리 태실, 온정리 태실, 삼달리 태실[신래 태실], 월송리 태실[화구 태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중 신래 태실, 나곡 태실과 화구 태실에서는 관련 유물들이 확인되어 태실임이 확실해졌다.

1. 삼달리 태실

삼달리 태실[신래 태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울진군 평해읍 삼달리 산66번지이다. 이 태실은 북서쪽의 주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끝자락에 돌출되어 솟아오른 삿갓 모양의 봉우리 정상부에 위치한다. 서남쪽으로는 남대천이 휘돌며, 그 주변으로는 논 평야가 펼쳐져 있다. 산 정상부에는 태함이 열려져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영남대학교박물관에, 엽전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1) 출토 유물

(1) 태함: 태함(胎函)은 돌로 만들었으며, 몸체인 기석(器石)과 뚜껑인 개석(蓋石)으로 구성된다. 기석은 원통형[높이 89.5㎝ × 지름 94㎝]으로 내부에는 원통형 홈을 파고 그 바닥에는 작은 구멍을 뚫었다. 개석은 반구형(높이 67㎝ × 지름 96㎝)이다.

(2) 태항아리: 태항아리는 항아리와 뚜껑으로 구성된다. 항아리[높이 35.6㎝ × 구경 24㎝]는 백자로 어깨에서 배가 부르다가 저부로 가면서 좁아지는 기형으로 어깨에는 4개의 C자형 고리가 달려 있다. 뚜껑(높이 16.5㎝ × 개경 29.5㎝)은 보주형의 손잡이가 달렸으며, 손잡이 목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

(3) 태지석: 태지석[가로 15㎝ × 세로 20.5㎝]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었으며, 표면에는 정간구획(井間區劃)을 만들어 그 안에 글씨를 “황명성화이십이년십이월초육일해시생 왕자견석태성화이십삼년사월초칠일오시장(皇明成化二十二年十二月初六日亥時生王子堅石胎成化二十三年四月初七日午時藏)”라고 음각하였다.

(4) 엽전: 완형의 조선통보(朝鮮通寶) 동전[지름 23.9㎜]으로 사각 구멍이 뚫려 있다. 글자는 보(寶) 자의 갓머리가 짧은 단관보(短冠寶)이며, 패(貝) 자의 아래 부분이 팔(八) 자 모양으로 된 팔족보(八足寶)이다.

2) 주인공 검토

태지석의 명문에 의하면, 주인공은 1486년(성종 17) 12월 6일 오후 9~11시 사이에 태어난 왕자 견석으로 장태는 다음해인 1487년 4월 7일 오전 11~오후 1시 사이에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왕실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에 의하면, 성종은 부인 12명, 자녀 16남 12녀를 두었다. 성종의 왕자 태실지와 그 주인공이 대부분이 밝혀지고 있지 않다. 그럼 이 신래태실의 견석왕자(堅石王子)는 누구였을까?

성종의 아들 중에 견석왕자는 없을 뿐더러 같은 출생 연도인 1486년생 자식으로는 딸인 정순옹주와 숙혜옹주뿐으로 아들은 없다. 그러므로 견석왕자는 태어나자마자 죽어서 족보에도 올라가지 못한 왕자이거나 어떠한 이유로 왕실 족보에서 삭제된 왕자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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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성종의 왕자 일람표

2. 나곡리 태실

나곡리 태실[나실 태봉]은 울진군 북면 나곡리 산6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의 주산으로 경사를 두고 뻗어 내린 산줄기의 말단부에서 봉긋하게 삿갓 모양처럼 솟아오른 봉우리 정상부에 있다. 서쪽에서 흐르는 조그마한 내가 태봉산의 북쪽으로 돌아 흘러가며, 주위로는 논이 형성되어 있다. 좌청룡·우백호의 역할을 하는 산줄기가 태봉산을 두르고 있다. 봉우리 정상부에는 도굴로 인해 굴토된 흔적이 있으며, 북동쪽에 아기태실비가 세워져 있다. 오래 전에 도굴되었는데, 태함과 아기태실비는 유존하나 태지석은 행방을 알 수 없다.

1) 출토 유물

○ 아기태실비: 아기태실비[현고 168㎝]는 비수와 비신을 한 돌로 만들었으며, 비대는 별도의 돌로 만들었다. 비수에는 앙련과 보주가 장식되어 있으며, 앙련의 위쪽에는 연꽃 줄기를 형상화한 조각이 양각되어 있다. 비대는 윗면은 네 모서리 각을 죽여 복련으로 장식하였고, 전면·후면·측면에는 안상을 장식하였다. 비신의 앞면에는 “[황명]만력사십칠년육월이십삼일생왕녀아기씨태실((皇明)萬曆四十七年六月二十三日生王女阿只氏胎室)”, 뒷면에는 “만력사십칠년십일월초사일입(萬曆四十七年十一月初四日立)”라고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 태지석: 태지석[가로 27㎝ × 세로 27㎝]은 명문이 앞면에는 “황명만력사십칠년육월이십삼일해시생왕녀아기씨태(皇明萬曆四十七年六月二十三日亥時生王女阿只氏胎)”, 뒷면에는 “만력사십칠년십일월초사일기시장(萬曆四十七年十一月初四日己時藏)” 라 음각되어 있다.

2) 주인공 검토

비와 지석의 명문에 의하면, 주인공은 광해군 11년 6월 23일 오후 9~11시 사이에 태어난 왕녀 아기로 장태는 그 해 11월 4일 오전 9~11시 사이에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선원록』에 의하면, 광해군은 2명의 부인에게서 1남 1녀의 자식을 낳았다. 숙의윤씨에게서 1619년(己未年)에 옹주를 낳았는데, 박징원에게 시집 간 이 옹주의 출생 연도(己未年)가 나곡리 태실의 비와 지석에 기록된 출생 연도[만력 47년]와 같으므로 이 옹주가 나곡리 태실의 주인공이다.

3. 월송리 태실

월송리 태실[화구 태실]은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산15-1번지에 위치한다. 태실은 주산인 일출봉[131m]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끝자락에 돌출되어 솟아오른 봉우리 정상부에 있다. 태봉산 주위로 좌청룡·우백호의 역할을 하는 산줄기가 돌려져 있으며, 서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내가 태봉산의 북쪽으로 돌아 황보천에 합류하며, 주변에는 논 평야가 펼쳐져 있다.

1) 출토 유물로는 태함이 있다. 태함은 기석과 개석으로 분리된다. 개석은 반구형[지름 111㎝ × 높이 57㎝]이며, 기석은 원통형[지름 112㎝ × 높이 89㎝]이다. 기석의 내부에는 큰 원통형 홈을 파고 그 바닥에는 작은 홈을 뚫었다. 또 기석과 개석을 접합한 석회가 부착되어 있는 것이 일부 확인된다.

2) 주인공 검토

발굴 조사 시 이미 공사로 인해 유구의 대부분이 훼손되었으며, 태함도 원 위치를 이탈한 상태였다. 더 이상의 자료가 없어 주인공을 알 수는 없으나, 조성 시기는 태함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반구형의 개석과 원통형의 기석으로 된 태함의 양식은 조선시대 월산대군 태함[1462] 이후부터 광해군 태함[1581] 이전에 나타나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현재 확인되는 태함의 양식으로 보아 조성 시기는 성종의 딸 태함[1476]~덕양군 태함[1528] 사이이다.

4. 온정리 태실

온정리 태실울진군 온정면 온정리 산146-1번지에 위치한다. 태실은 주산으로 보이는 백암산의 서남쪽으로 경사를 두고 뻗어 내린 산줄기의 말단부에서 봉긋하게 솟아오른 절태봉이라 부르는 봉우리 정상부에 있다. 태봉산의 아래에는 서쪽에서 내가 산의 남쪽으로 휘돌아 동쪽으로 흘러 마을 앞을 지나가며, 남동쪽 바로 밑에는 절터가 있었다고 한다.

태실이 위치한 산봉우리 정상부에는 긴 타원형의 평탄 대지로 되어있는데, 정상 곳곳에는 바위가 산재해 있다. 지금으로서는 태실의 흔적이 찾아지지 않지만, 홍성익이 처음으로 이 절태봉을 태실지로 추정하였다. 풍수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조선시대 태실지일 가능성이 높으나 더 이상의 자료가 없어 단정할 수 없다.

5. 사계리 태실

사계리 태실울진군 북면 사계리 산96번지에 위치한다. 태봉은 천변에서 곳집골과 피밭골 사이로 삿갓 모양처럼 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 정상부에 있다. 주변에는 세천이 흐르며 논들이 형성되어 잇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태봉재’라고 부르고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 태봉의 산 정상부에 약간의 평탄한 대지가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나지막한 봉분의 흔적이 확인된다. 이 봉분이 태함이 묻혀 있는 조선시대 아기 태실로 추정되나 더 이상의 자료가 없어 태실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조선 왕실의 정기를 끊다]

1. 왕실의 태실 설치 이유

조선 왕실에서 전국의 명당을 찾아 태실을 조성한 이유를 구체적 사료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① 음양학을 하는 정앙(鄭秧)이 글을 올리기를, “당나라 일행이 저술한 『육안태지법』에 말하기를, ‘사람이 나는 시초에는 태로 인하여 자라게 되는 것이며, 더욱이 그가 어질고 어리석음과 성하고 쇠함은 모두 태에 관계 있다. 이런 까닭으로 남자는 15세까지 태를 간수하게 되나니, 이는 학문에 뜻을 두고 혼가(婚嫁)할 나이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남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는 것이요,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에게 흠앙(欽仰)을 받게 되는데, 다만 태를 간수함에는 묻는데 도수(度數)를 지나치지 않아야만 좋은 상서(祥瑞)를 얻게 된다. 그 좋은 땅이란 것은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하여야만 길지가 된다.’고 하였다.

또 왕악(王岳)[명나라 사람]의 책을 보건대, ‘만 3개월을 기다려 높고 고요한 곳을 가려서 태를 묻으면 수명이 길고 지혜가 있다.’ 하였으니, … 일행과 왕악의 태를 간수하는 법에 의거하여 길지를 가려서 이를 잘 묻어 미리 수(壽)와 복(福)을 기르게 하소서.”하다.[『세종실록』 세종 18년 8월 초8일]

② 부지돈녕부사 권총이 글을 올리기를, “또 태를 감추는 것은 수(壽)를 기르고 병을 막는 방비입니다.”하다. [『세종실록』 세종 30년 4월 9일]

③ “『태장경』에 이르기를, 대저 하늘이 만물을 낳는데 사람으로서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로 인하여 장성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盛衰)가 모두 태에 매여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릇 태에서 내려온 지 3월에는 명칭을 화정태(和正胎)라 하고, 5월에는 연장태(軟藏胎), 3년에는 장응태(壯應胎), 5년에는 중부태(中符胎), 7년에는 향양태(向陽胎), 15년에는 과양태(過陽胎)라 하니, 이를 ‘육안태법’이라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경서(經書)에 이르기를 ‘남자가 15세가 되면 학문에 뜻을 둘 나이이고, 여자가 15세면 남편을 따라야 할 나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남자는 마땅히 연장태·중부태·향양태 중의 연월(年月)에서 간수하여 학문에 뜻을 둘 나이를 기다려야 하고, 여자도 또한 화정태·장응태·과양태의 연월에서 간수하여 남편을 따라야 할 나이를 기다려야만 하니, 남자가 만약 좋은 땅을 만난다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구경(九經)에 정통하며 얼굴이 둥글고 상쾌하게 생겨 병이 없으며, 관직이 높은 곳에 승진되는 것입니다.”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9월 초8일]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장태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녀 장래의 운명까지 결정하고, 이것이 왕자나 왕세자의 경우는 장래 국가의 운명까지 결정될 수 있다는 의식과 관념에 의한 것으로 전통적인 풍수지리설에 근거한 것이다. 즉, 왕실에서는 태에 대한 존중은 수(壽)를 기르고 병을 막는 방비이기 때문에 태를 명당에 모심으로써 왕족들의 무병장수를 바란 것이 그 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면에는 전국에 있는 사대부나 백성들의 명당을 빼앗아 태실을 만들어 씀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요인을 사전에 없애자는 의도도 있었다.

[민족의 정기, 일제에 의해 잘리다]

이러한 왕실의 태실이 일제강점기에 훼손되고 파괴되어 수난을 당하게 된다. 즉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는 동안 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궁·능·원 등의 전통 조경 공간을 훼손시켰다. 특히 일제는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에 전국의 수많은 태실을 파괴하고 강제 철거하여 왕의 태실 21위, 왕자 및 공주의 태실 32위 등 모두 53위의 태실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옮겼다.

왜 이렇게 많은 조선의 태실을 한 곳에 모아 놓았을까? 이는 앞에서 설명한 조선이 태실을 조성하게 되는 이유를 일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일제는 조선의 염원과 땅의 정기를 파괴함으로써 당시 우리 민족에게 이씨(李氏) 조선의 멸망을 확인시켜 주고자 하는 식민 통치 의도가 강하게 반연된 것이다.

백성들은 왕실의 태실이 자기 고향에 오는 것을 큰 영예로 생각하였으며, 태실이 설치되는 지역은 그 읍격이 승격되기도 하였다. 백성들은 왕실의 뿌리가 자기 지역에 설치됨으로써 왕실과의 일체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왕실과 백성들의 연결 고리가 되는 태실을 파괴함으로써 조선인들이 국가를 생각할 여지를 없애려고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서삼릉에 옮긴 태실 주변을 일(日) 자 모양의 담장으로 막아 더 이상 조선의 정기가 빛을 발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말살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전국에 산재되어 있던 태실이 연고도 없는 서삼릉으로 옮겨지게 되었으며, 이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울진 지역에도 태실이 5기나 조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 이렇게 많은 태실이 설치되었던 것은 지리적 조건이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왕실의 장태 문화에 내제된 그 이면의 이유가 울진 지역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에 울진 지역에서는 큰 인물이 배출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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